Day 6. 에스떼야 → 로스 아르꼬스
로스 아르꼬스로 가는 길, 잠시 목을 축이려고 들어선 바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많았다. 그중에는 브라이언도 있었다. 그와 함께 순례를 시작했던 데이비드는 뿌엔떼 라 레이나까지 함께 걸은 뒤 어느새 집이 있는 더블린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대신 그의 옆엔 프랑스에서 온 에밀과 스웨덴에서 온 조던이 있었다.
"여기는 은영이야. 이번이 까미노 두 번째 순례이고 저기 계신 엄마랑 같이 걸으려고 왔대. 그리고 은영은 쿨한(!) 타투가 있는데 이거 봐봐."
브라이언은 에밀과 조던에게 나 대신 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브라이언은 내가 처음 만나는 순례자에게 내 소개를 종종 대신하곤 했다. 여기는 은영이야…라고 그가 말을 시작할 때마다 그 상황이 몹시 웃음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웃음소리를 의식했고 '은영'이라는 이름을 잘못 발음해서 웃는다고 생각해 주눅이 들곤 했다. 나는 민망해하는 그에게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아니, 네가 내 소개를 대신하는 게 웃기잖아. 내 소개는 내가 해야지!"
브라이언은 내 웃음의 이유가 자신의 발음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서로 소개해주는 걸 좋아한다고. 뭐, 가깝게 지내는 아일랜드 친구가 없던 터라 나는 그렇다고 믿어주기로 했다.
아무튼 에밀과 조던에게 내 소개를 해주는 브라이언의 말을 이어받아 나는 내 팔에 있는 타투를 설명했다. 브라이언이 눈짓으로 타투를 어서 소개해보라고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오른팔의 안쪽에 '영아 사랑해♡'라고 새겨진 타투가 보이도록 팔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한글로 쓰인 레터링 타투를 읽을 수 없는 그들에게 단어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이건 내 이름이야, 옆에는 사랑해라는 의미고. 엄마 손글씨를 그대로 옮겨 새긴 타투야."
감탄하며 내 타투를 치켜세워주는 그들에게 '은영아' 대신 '영아'라고 새긴 맥락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앞의 단어가 이름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그 지역의 여느 어르신들처럼 나를 부를 때 이름의 끝자만 부르곤 한다. 엄마에게 은영보다 영이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했다. 엄마의 손글씨로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엄마에게 '영아'로 써달라고 구체적으로 주문을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분명 내 첫 타투를 보고선 눈을 흘기며 나를 노려봤던 엄마였는데… 엄마의 손글씨로 타투를 하겠다는 말에 엄마는 종이와 펜을 찾기 시작했다. 뭐라고 쓰면 되는데? 하고 묻더니 정성껏 두 번에 걸쳐 '영아 사랑해♡'를 적었다. 첫 번째로 적은 문장 끝에 쓴 ♡가 조금 찌그러진 탓이었다. 어…? 그런데 내가 ♡도 써달라고 했던가? 어쨌든 엄마가 나를 불러줄 때처럼 동그랗고 정겨운 글씨를 세길 수 있었다.
"은영, 그런데 겨울에 언제쯤 걸은 거야? 10월? 11월?"
지난 며칠간 보지 못했다고 할 말이 무척 많은 우리였다. 브라이언은 늘 그랬듯 나의 첫 번째 까미노에 대해 궁금해했다. 응? 그런데 10월? 11월? 그때는 가을이 아닌가? 유럽은 그 시기도 겨울로 쳐주는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답을 했다.
"12월 말에 시작했어.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26일에 생장에 도착했고, 27일에 피레네를 넘었지. 그렇다 보니 1월을 모두 순례길에서 보냈어."
"어? 12월 말? 1월? 진짜 한 겨울이잖아. 미쳤어! 말도 안 돼."
듣고 보니 브라이언이 내가 까미노를 걸은 구체적인 때가 10월과 11월인지 물은 것은 설마 12월과 1월은 아닐 거란 생각 때문이었나 보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 나는 미쳐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한 겨울에 까미노를 갈 리가 없으니까.
"아까 지나쳐 온 아예기 생각나? 그때 거기서 새해를 맞았거든.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마을 중 하나야."
에스떼야에서 출발해 로스 아르꼬스로 가는 길, 에스떼야에서 약 2km 정도 걸으면 나오는 아주 작은 마을인 아예기에서 나는 연말연시를 보냈다. 겨울의 까미노는 순례자가 적기 때문에 웬만한 알베르게가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한다. 비교적 활기찬 마을이 형성된 에스떼야에서 새해를 보내려고 했던 우리는 계획과 달리 아예기까지 가게 되었다.
그래도 다가오는 2013년을 잘 맞이해 줘야지 않겠냐며 나와 함께 걷던 잭과 나초는 앞장서서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스페인 사람인 나초는 슈퍼마켓에서 엄청난 양의 포도가 진열되어 있는 곳을 향해 제일 먼저 찾아갔다. 뒤에 따라오는 우리를 돌아보고 몇 명인지 쓱 살펴본 다음에 통통하게 익은 포도송이가 모자라지 않게 카트에 담았다. 알베르게에 돌아와 음식을 꺼내놓고 상을 차리는데 나초는 자리마다 접시를 하나씩 더 올려놓더니 포도알을 12개씩 놓았다. 그 이유를 알리가 없는 나는 별생각 없이 포도를 집어 먹으려고 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나초는 헐레벌떡 달려와 나를 말렸다.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나초의 의중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잔뜩 차려놓은 다른 음식에 손을 뻗으며 기다려보기로 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격 없이 놀았다. 나초는 〈라쿠카라차〉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나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며 따라 췄다. 잭은 아까부터 그런 우리를 열심히 사진으로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코와 바실리오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움직이느라 몹시 분주했다. 동시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술이 들어간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자정이 다가오자 나초는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을 귀 기울여 듣더니 다시 포도알이 있는 접시를 챙기기 시작했다. 수선스럽게 구는 나초 때문에 덩달아 우리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에 귀를 기울였다. 곧 새해를 알리는 12시 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나초는 첫 번째 종이 울리자 손짓 눈짓을 해가며 포도알을 먹으라고 우리를 부추겼다. 아직 포도가 입 안에 있는데 나초는 두 번째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입에 넣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12개를 다 입에 넣고서야 그 세리머니는 끝이 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새해를 맞이하는 스페인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포도알을 종소리에 맞춰 먹다가 응급실에 가는 이들도 많다고!
“펠리즈 아뇨 누에보!”(Feliz año nuevo, 'Happy new year'에 해당하는 새해 인사의 스페인어)
나는 떡국 대신 포도알을 먹으며 비로소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그때는 이른바 '한국나이'를 쓰던 때라 까미노를 시작했을 때는 스물넷이었던 것이다.
과업을 마친 나초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다시 여흥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내일의 일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셨다. 마치 그 누구도 순례자가 아닌 것처럼.
"영아, 내일 걸어서 가자."
엄마의 체력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 한두 번 정도는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다음 구간은 로그로뇨라는 까미노에서 만나는 두 번째 대도시에 닿는 길이었다. 버스로 편하게 이동해 여유롭게 도시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 분명 이야기를 했는데 로스 아르꼬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며 짐을 푸는데 엄마가 나서서 계획을 틀어보자며 제안했다. 지난 이틀간 베드로 덕분에 배낭 없이 걸어서였을까, 심지어 배낭을 메고 걸은 날이었는데도 엄마는 편안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내가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엄마의 곡소리를 듣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대신 지난 이틀에 비해 긴 거리를 걸어야 하니 배낭을 부치고 걷기로 했다.
나는 걷는데 별 다른 문제가 없었기에 엄마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 터였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최근 며칠간 엄마는 다리에 생긴 알레르기 반응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로그로뇨는 큰 도시이다 보니 그곳에서 병원 진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빰쁠로나에서 약국을 들러 바르는 약을 샀지만 영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병원에 가는 일은 까다롭기 때문에 버스로 일찍 도시에 도착해 병원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병원을 가려고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친구 문에게 필요한 전문용어(?)도 스페인어로 알아봐 둔 상황이었다. 응급실은 살라 데 유르젠시아스(Sala de Urgencias), 진단서는 인포르메 메디꼬(Informe médico), 처방전은 레세따(Receta), 영수증은 레시보(Recibo). 서른다섯 개 이상의 나라를 여행한 이력에도 병원 방문은 처음이었다. 걱정하는 내게 병원에 가서 의사소통이 어려우면 전화를 하라며 친구는 나를 안심시켜 줬다. 산띠아고로 가는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베드로는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단단히 일러뒀지만, 짧은 스페인어와 영어가 전부인 여행자로서 도움을 청할 한국인 친구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예전에 내가 다른 여행을 갈 때 알레르기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그때 먹은 약이야. 엄청 순한 거라 부작용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약이 들면 좋겠는데… 하루에 하나씩 먹어보고 네 엄마가 괜찮아지시면 병원엔 되도록 가지 마. 어후, 너무 힘든 일이야. 해외에서 병원에 가는 건!"
때마침 알베르게의 화장실에서 만난 잉이 내 고민을 듣더니 자신에게 약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잉을 처음 본 것은 피레네를 넘으며 지나친 오리손 산장 근처에서였다.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도 옆나라쯤인 것 같다며 동아시아 사람들끼리만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으로 그를 인지했다. 언젠가 말을 붙여봐야지, 했던 다짐은 빰쁠로나에 가던 날 잉을 다시 길에서 만나서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잉은 역시나 중국 출신이라고 했다.
"엄마, 잉 언니가 약이 있대. 괜찮으면 먹어보겠냐는데?"
나는 엄마와 이야기할 땐 자연스럽게 잉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붙이고는 했다. 생김새가 나와 비슷해서인지 다른 외국인 언니들을 대할 때와 다르게 언니라고 부르기 쉬웠다. 우리가 잠시 알베르게를 비운 사이에 엄마 침대 위에 잉이 올려둔 약을 발견했다. 덕분에 병원을 가는 건 잠시 미룰 수 있었다.
"얼른 만나고 싶다. 잉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해야지."
엄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보기로 한 잉을 생각하며 약을 입고 있는 조끼의 호주머니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베르게의 같은 객실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나랑 엄마 빼고 모두 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의 커뮤니티 디너에서 안면을 튼 마담 실비를 제외하고 모두 처음 보는 사이였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실비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느라고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번역 앱을 열심히 가동하는 중이었는데 한 어르신께서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내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나는 스마트폰을 그에게 가져가 듣기 버튼을 눌렀고 말씀해 보시라는 신호를 보냈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의 음성을 엄마의 표현대로 나는 미끄러지는 노래처럼 들으며 결과 값을 기다렸다. 엄마는 프랑스어가 꼭 노래 같다며 종종 말하곤 했다. 어르신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 나는 앱에 나타난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확인했다.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를 한국어로 곧바로 번역하면 표현이 영 엉터리라 낸 꾀였다. 어? 내가 이해한 게 맞나? 다른 뜻일리가 없는데도 나는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했다. 역시 내가 이해한 의미가 맞았다. 그럼에도 재차 확인하고 싶어서 영어로 문장을 구성해서 번역 앱에 입력했다. 어느새 그 어르신 옆에 아내로 보이시는 분도 다가와 함께 계셨다.
-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두 분이 입양한 자녀가 한국인이라는 뜻인가요?
이 문장은 프랑스어로 번역이 되었고 그들은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위'(Oui, '네'라는 긍정 의미의 프랑스어)라며 짧게 답하며 웃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를 불렀다. 자초지종을 이해한 엄마는 벌떡 일어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어릴 때 입양한 두 자녀는 이제 41살과 38살이 되었다고 했다. 모두 가정을 꾸려 지금은 세 명의 손주가 생겼다고. 사진첩에서 몇 해 전에 다녀온 서울 여행 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사진 속에서 본 얼굴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맑은 날에 볼 수 있는 유럽의 시원하게 트인 하늘처럼. 두 자녀의 얼굴은 영락없는 한국인의 모습이었지만 미소는 내 앞에 계신 이분들을 닮아 있었다. 엄마의 말처럼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엄마는 화답을 하듯이 까미노에 오기 전 여행했던 파리 여행 사진을 꺼내 보여드리기 시작했다.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 아내 분께서는 파리가 더럽지 않았냐며, 서울은 여행하며 무척 깨끗하다고 생각했다며 엄마의 의견을 물었다. 거짓말에 재주가 없는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동의하고 말았는데 덕분에 허물없는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프랑스어는 영어를 거쳐 한국어로, 한국어는 영어를 거쳐 프랑스어로 세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대화였다. 음색이 서로 다른 세 개의 노래가 조화롭게 들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로스 아르꼬스에 자리한 교회를 찾았다. 잠시 그곳을 머물며 안전을 바라는 기도를 했다. 다행히 엄마의 체력도 점차 돌아오고 잉이 준 알레르기 약이 들기 시작해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제 겨우 걸은 지 일주일을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었다. 게다가 한낮에 택시를 불러 길을 급히 떠나는 순례자를 본 날이기도 했다. 걷기가 불편한지 바에서 택시에 오르는 그 짧은 거리도 절뚝거리며 겨우 타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크게 다친 게 아니여야 할 텐데. 그를 위해서도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두세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통해 약속한 신을 기억하며 눈을 감았다.
Day 6. JUN 15, 2024
Estella → Los Arcos, 21.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