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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29. 2024

내가 사랑한 오 세브레이로

Day 26. 비야쁘랑까 델 비에르소 → 오 세브레이로

"은영, 네 엄마 무슨 일 있니?"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와 다르게 엄마는 현저히 뒤처져 걷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살피는 내게 던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물었다. 나는 잠시 멈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 어디 안 좋아? 항상 앞에서 걷더니 무슨 일이야?"

"별일 없어. 오늘은 다른 친구들이랑 맞춰서 걷기로 했잖아. 그래서 천천히 걷는 거야."


세상에 엄마가 천천히 걷는 날이 오다니! 내가 아무리 말해도 좀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천천히 걷게 하는 친구들이 무척 귀하게 여겨졌다. 처음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와 떨어져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라 빠바에서 멈추고 나는 4.5km를 더 걸어가 오 세브레이로에서 멈추기로 했기에 나는 엄마에게 이들과 속도를 맞춰 걷자고 했다. 같이 출발을 하더라도 빠른 속도로 늘 앞질러 가던 엄마는 던, 프란체스카, 그리고 마르티나의 속도를 의식하며 보폭을 조절했다.


정오가 됐을 무렵, 오전 내내 부지런히 걸은 끝에 라 빠바에 닿았다. 엄마는 라 빠바의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등산화과 양말을 벗고서 슬리퍼로 잽싸게 갈아 신었다. 그리고 알베르게의 앞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에 발을 담그던 프란체스카 옆에 앉아 두 발을 살포시 물에 담갔다. 프란체스카는 내게 배운 ‘엄마’라는 한국어로 엄마를 부르며 먹던 땅콩을 나눠주었다.


프란체스카는 엄마와 함께 지내며 종종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곤 했다. 엄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면 나눠주는 침대 시트를 프란체스카 대신 씌우고,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을 때마다 프란체스카가 앉기도 전에 테이블이며 의자를 닦아주고, 밝게 웃으며 걷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종종 사진으로 담아주기도 했다. 엄마는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프란체스카는 자신을 친근하게 잘 대해주는 엄마에게 마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랑 둘이서 사진을 찍은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나 네 어머니랑 닮은 거 같지 않아?"


내가 보기엔 닮은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는데도 프란체스카는 끝까지 사진을 유심히 보라고 주장했다. 웃는 얼굴이 꼭 닮았다면서.


"은영, 네 엄마가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걸 잊지 마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거라."

"은영아, 얼른 가라. 너무 늦으면 힘들다. 엄마 잘 있을게."


나는 당부를 전하는 두 어머니의 편안한 목소리에 안심을 하며 라 빠바를 떠났다.


엄마와 친구들이 머물다 갈 라 빠바의 알베르게를 나서며




오 세브레이로를 향해 가는 길에서 잊혔다고 생각한 기억이 떠올랐다. 눈 속을 걸으며 과연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었던 그때, 마지막 경사를 앞두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였다. 고된 마음을 접어두고 설레는 마음을 활짝 펼친 채 나는 오 세브레이로의 설경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경사 끝에 마주한 오 세브레이로는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새하얀 눈 위에 선명히 발자국을 찍을 때서야 겨우 현실의 감각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네가 왜 오 세브레이로를 까미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다."


먼저 와 있던 메리와 몰리사가 이제 막 도착한 나를 반기며 말했다. 나는 바람에 엉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웃음으로 대신 답을 했다. 나는 두 번째 만난 오 세브레이로에 또다시 반한 탓에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처음으로 찾았던 시절에는 눈이 쌓인 겨울이었던 터라 미처 보지 못한 오 세브레이로의 생동이 넘치는 여름과 나는 계속 눈을 마주쳤다.


해발 1300m에 위치한 마을 오 세브레이로에서 바라본 전경


나에게는 과업이 하나 있었다. 12년 전 이는 눈발을 헤치며 도착한 오 세브레이로의 어느 바를 찾아 나섰다. 그때 우리를 반겨준 바의 주인은 언 몸을 녹이는데 좋다며 끄레마 데 오루호(Crema de orujo, 스페인에서 마시는 칵테일의 이름)와 리꼬르 데 이에르바스를 권했다. 바 한 편에서는 가이따 가예가(Gaita gallega,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 전통 악기) 연주가 한창이었다. 주말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던 나초가 잭과 라이자, 그리고 내가 있는 길 위로 돌아와 비야쁘랑까 델 비에르소에서 우리와 함께 오 세브레이로까지 걸어온 터였다. 나초는 지난번 연말파티 때처럼 내게 춤을 추자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성지를 품는 갈리시아 주의 첫 마을, 오 세브레이로에서 그와 함께 아무렇게나 춤을 췄다.


그때 찍은 사진 몇 장이 다였지만 내가 간직한 추억을 찾는 단서로서 손색이 없었다. 짐을 푼 공립 알베르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바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첫 번째로 들어선 바에 고개를 안으로 쭉 내밀고 살펴봤다. 사진과 비교하며 살펴봤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두 번째로 가까이에 있던 바에 들어섰다. 어? 익숙한 공간 구조에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놓은 사진을 다시 살펴봤다. 바의 뒤편에 있던 화덕 대신에 신식 주방 시설이 들어서있어 사뭇 다른 인상을 자아냈지만 우리가 먹고 마시던 그곳이 맞았다. 나는 주방에 있던 직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바의 주인이 여전히 이곳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에 손을 닦고서 내 스마트폰의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 바 맞은편에 있던 어느 호텔 앞에서 동네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던 이에게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 사람이 내가 찾던 바의 주인 이레네였다.


"세상에 12년 만에 온 거예요? 고마워요, 저를 기억하고 찾아줘서. 이제 바를 임대했고 저는 이 호텔만 운영하고 있어요."


이레네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게 비쥬를 했다. 고마운 건 내 쪽이었다. 여전히 이곳에 있어준 덕분에 추억을 가슴에만 묻어두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다음에도 올 거죠? 그때도 날 찾아와요. 가만, 세 번째는 언제가 좋을까……. 내년은 어때요?"


아직 세 번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선뜻 다음에도 그것도 내년에 당장 다시 오라는 이레네의 말에 슬그머니 세 번째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품어보았다.


오 세브레이로에 자리한 바를 운영하던 이레네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겨울에는 눈이었다면 여름의 오 세브레이로는 바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Brave enough to go climbing a wall so high
That no sunlight is seen through winter
Brave enough to go traveling around the world
Without money to eat or sleep for
Seeing what you can do with your hands and feet
I feel there is no question about it

Almost anything you can imagine
Almost any goal, you will get there

-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Rocky Trail〉 중에서


오 세브레이로의 전망대에 오르며 나는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가쁜 호흡으로 끊임없이 바람을 몰고 오는 날씨에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Rocky Trail〉를 떠올렸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경치와 잘 어울리는 선곡이라고 생각했다. 오 세브레이로의 여름은 바람으로 기억해야겠다며 낡은 추억 위에 지금의 순간을 포개었다.


노란 화살표가 새겨진 작은 돌

나는 오 세브레이로의 어느 교회를 찾았다. 미사는 없이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기도가 마련되어 있던 날이었다. 봉사자는 순례자들을 단상 앞으로 불러 동그랗게 둘러 설 수 있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작은 돌을 하나씩 손 위에 올려주었다. 거기에는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몇 가지의 언어가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봉사자는 모여있는 순례자들을 향해 물었다. 스페인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다양한 언어를 가진 이들이 손을 들며 자신의 모국어를 답했다. 그곳에 유일한 한국인은 나였다. 나는 내가 가진 언어가 이곳에 있음을 이야기했다.


봉사자는 각국의 언어로 적힌 기도문이 있는 파일 더미를 훑으며 방금 들은 언어의 기도문을 모두 찾아냈다. 그리고 각 언어로 기도문을 읽을 대표자를 자원받아 읽도록 했다. 한국어를 가진 다른 후보자가 없던 터라 나는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발자국 소리를 의식하며 걸어갔다.


"사랑이 당신 여정에 희망의 빛이 되게 하며, 평화가 당신 마음에 가득하소서. 선하심이 당신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당신의 믿음이 삶의 신비에서 당신을 굳세게 하소서. 신이 당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때에, 사랑이 당신을 영원히 감싸게 하소서."


이곳에서 내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기도문 말미에 있는 마지막 문장을 청중을 향해 바라보며 말했다.


"행복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세요."




이레네를 찾았던 바로 다시 돌아갔다. 거기서 샐러드와 비노 블랑꼬(Vino blanco, '화이트 와인'의 스페인어)를 한 잔 주문했다. 오 세브레이로가 속한 갈리시아에서는 화이트 와인을 마셔야 하는 법이라며 나초가 일러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가 한창이라 바 안에서는 온 마을의 동네 사람들과 순례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어울려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야외석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음식과 함께 셀피를 찍었다. 엄마와 저녁 식사 중이라며 프란체스카가 사진을 보내온 터였다. 그에 호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라 빠바에 있는 내 가족에게 보낼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식사를 하며 일기를 쓰는데 날이 제법 쌀쌀했다. 제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해발 1300m에 위치한 마을의 여름은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바 안에는 열광하며 축구를 보는 이들이 가득해 여석이 없었다. 나는 일기를 쓰던 걸 멈추고 대신 눈에 뒤덮여 있던 오 세브레이로의 조각들을 찾아보는 경험을 했다. 12년 전에 찍어둔 마을 곳곳의 사진을 살피며 지금 오 세브레이로의 모습을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오 세브레이로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오 세브레이로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오 세브레이로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오 세브레이로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오 세브레이로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7월


내가 이곳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흐른 세월만큼 마음은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나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내게 큰 선물을 주는 오 세브레이로가 좋았다.


아, 정말이지. 나는 오 세브레이로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오 세브레이로



Day 26. JUL 5, 2024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eiro, 28.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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