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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28. 2024

함께 걸으며 다져진 시스터후드

Day 25. 뽄페라다 → 비야쁘랑까 델 비에르소

그룹을 지어 뽄페라다를 떠나는 우리

순례자들 사이에서 괴담이 돌고 있었다. 최근 이른 새벽에 뽄페라다를 떠나던 어느 순례자가 강도를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길을 오가며 본 얼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출발할 시간을 맞추자며 입을 모았다. 특히, 우리는 혼자 다니는 뻬레그리나(Peregrina, '순례자'를 뜻하는 여성형 명사의 스페인어)를 챙겼다.


"네가 안나 맞지?"

"응! 맞아. 내가 안나야. 어머니랑 같이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은영이야. 안나는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했던가?"


프란체스카와 함께 다닌 후로 엄마와 내 주변에는 부쩍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간 얼굴만 익히다가 미처 통성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안나에게 가벼운 인사를 했다.


"이제 다 모인 것 같아. 출발하자!"


던, 프란체스카, 마르티나, 안나, 잉, 메리, 엄마와 나까지 제법 큰 무리였다. 이 정도면 아무리 간 큰 강도여도 표적으로 삼긴 어려울 듯싶었다. 프란체스카는 선두로 나서서 걷는 엄마를 가리키며 투어 가이드 같다고 했다. 엄마는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싹 풀렸다며 한결 가벼워진 두 다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엄마를 따르며 뽄페라다를 벗어났고 걱정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은영, 방금 네가 시킨 거 뭐야? 정말 좋아 보인다."


바에서 주문한 아침 식사를 주인에게 건네받은 내게 메리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침마다 먹는 메뉴가 정해져 있는데 바로 또스따다 또마떼 이 아쎄이떼(Toastada tomate y aceite, '토마토 오일 토스트'의 스페인어)이다. 비건인지라 아무거나 쉽게 먹기가 어려운 내게 데사유노(Desayuno, ‘아침 식사‘의 스페인어)로 주문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아, 이거 토마토 오일 토스트야! 비건이라서 이거 말고는 주문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니, 훌륭해서 물어본 거야! 훨씬 건강해 보이는데? 난 항상 버터를 발라 먹었는데 이걸 주문해야겠어."


메리는 주인에게 내 또스따다를 가리키며 같은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논비건인 그에게 별식 같을지 몰라도 사실 내게는 또스따다 또마떼 이 아쎄이떼가 주식인 터라 좀 물려 있었다.


아침 식사 후 다음으로 쉬어 가려고 들린 까까벨로스의 어느 식당에서도 비건인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또스따다 또마떼 이 아쎄이떼밖에 없다는 말에 아찔했다. 하지만 주인은 자신감을 보이며 평소에 먹는 것과 다를 거라며 언질을 줬다. 어디 속는 셈 치고 한 번 시켜봐? 나는 알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파라솔이 쳐진 테라스에 엄마와 함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내 주인은 야심 찬 얼굴로 테이블 위에 또스따다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매운 거 좋아하신다고 했죠? 마늘을 함께 넣고 간 거예요."


주문을 받으며 주방에 가기 전에 그는 내게 매운 걸 좋아하는지 물어본 터였다. 마늘을 함께 넣어서 갈았다고? 여태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라 흥미로웠다. 평소에도 음식에 갖은 실험을 즐겨하는 나는 맛이 무척 궁금해 얼른 갓 구운 빵에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와! 이런 맛이구나. 그가 자신 있어한 만큼 정말 색달랐다. 마늘을 갈아 넣은 거라는 말에 엄마도 토마토를 한 스푼 떠서 맛을 보았다. 꽤 취향 저격한 맛이었는지 엄마는 앞으로 이제 토마토를 이렇게 먹어야겠다며 몇 번 더 떠먹어보곤 했다.


며칠 전 폰세바돈을 가던 길에 들린 마을 산따 까딸리나 데 소모사의 또스따다 또마떼 이 아쎄이떼가 생각났다. 보통 그 메뉴를 시키면 토마토를 완전히 갈아내서 주는데 그곳은 채 썰듯 토마토를 잘게 다져 빵 위에 올려줬다. 덕분에 먹는 내내 토마토의 식감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날은 아멜리아가 내가 먹는 걸 보며 정말 건강한 아침 메뉴인 것 같다고 메리처럼 나를 따라서 같은 옵션의 또스따다를 주문했다. 나는 까미노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비건이었다. 


내가 꼽는 최고의 또스따다 또마떼 이 아쎄이떼 (좌) 산따 까딸리나 데 소모사의 El Caminante, (우) 까까벨로스의 Restaurante Saint James Way


채 썬 토마토를 올린 것이 까미노에서 맛본 가장 맛있는 또스따다라고 생각했는데 마늘을 함께 넣고 간 토마토에 어쩌면 순위가 바뀔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은 빵 조각에 마늘을 간 토마토를 발라먹는 중 남다른 유머 감각을 지닌 마르티나가 다가와 배낭을 풀며 말했다.


"산띠아고에 도착하면 은영은 또스따다가 되어 있겠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엄마가 나뚜랄 스틱에 달아둔 깃털.  프란체스카 말처럼 엄마는 정말 날아서 산띠아고에 가고 싶나 보다.


"은영, 네 어머니께 아이스크림 케이크 드실 건지 물어봐 줄래?"


프란체스카, 마르티나와 함께 개울에서 발을 담그고 돌아온 내게 메리가 물었다. 메리는 알베르게에 묵고 있는 아는 얼굴들을 모두 초대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나눠주고 싶어 했다. 다음날 오 세브레이로에 목적지를 두고 있던 메리는 그 이후로 속도를 내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메리는 며칠 뒤면 길에서 보기 어려울 순례자들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비건인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가 괜찮으시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알베르게의 앞마당에 옹기종기 모여든 이들도 어쩌다 보니 모두 뻬레그리노(Peregrino, '순례자'를 뜻하는 남성형 명사의 스페인어)가 아닌 뻬레그리나였다.


"은영, 너도 오 세브레이로에 간다고 했지? 우리는 내일까진 볼 수 있겠다."


지난밤, 뽄페라다의 알베르게에서 던과 프란체스카와 함께 앞으로 일정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다음날 비야쁘랑까 델 비에르소까지 걷는 것을 모두 동의했지만, 그다음 날 추천 코스로 알려진 오 세브레이로까지 걷는 구간에 대해선 프란체스카가 먼저 나서서 자신은 걸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빰쁠로나에서 무릎을 다친 후로 계속 고생을 하고 있던 프란체스카는 28km가 넘는 거리의 오르막을 계속해서 걷는 건 무리라고 했다. 심지어 오 세브레이로는 해발 1300m에 위치한 곳으로 프랑스 길에서 피레네를 넘는 구간 다음으로 힘든 여정으로 알려져 있다.


프란체스카는 대안으로 오 세브레이로에서 4.5km 지점에 떨어진 라 빠바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다. 덧붙여 오 세브레이로 이후 추천 구간이 20.8km이기에 다음날에는 마저 4.5km를 더 걸어 25km 정도로 맞춰 걸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던 역시 자신의 체력과 나이를 생각했을 때 프란체스카의 의견을 따르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엄마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오 세브레이로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이렇게 포기하자니 아쉬웠다. 오 세브레이로는 까미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이었으니까. 나는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저 대신 엄마 좀 봐줄래요? 혼자라도 오 세브레이로에 가고 싶은데……."

"왜 안 되겠니? 가거라, 은영. 네 엄마는 우리가 봐 드릴 테니까."


비야쁘랑까 델 비에르소의 알베르게

난 분명 가볍게 말한 거였는데 던과 프란체스카가 오히려 진지한 눈으로 오 세브레이로에 가라고 힘주어 말하는 바람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침에 엄마가 일어나시면 여쭤보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곳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아쉬움이 남겠니. 네 엄마만 괜찮으시다면 우리도 좋단다."

"그래, 은영! 걱정하지 마. 네 엄마가 얼마나 강한 분인데! 항상 우리보다 앞에서 걸으시잖아. 내가 지켜본 네 어머니는 정말 독립적이신 분이야."

"그리고 장담하건대 네 엄마가 우리를 돌봐주실 거다. 우리가 네 엄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 세브레이로에서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한편으로 엄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긴장이 됐다. 뽄페라다를 벗어나는 아침에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엄마는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또스따다를 먹는 내게 말했다.


"그래 보지 뭐, 겨우 하룻밤인데."


메리가 초대한 자리에 함께 있던 마리아나가 엄마와 내가 하루를 떨어져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멋진 생각이라며 우리를 격려했다. 파리가 집이라는 마리아나에게 엄마는 스마트폰 사진첩에서 파리 여행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마리아나는 엄마가 보여준 파리의 명소들을 본토 발음으로 반기며 함께 사진을 구경하며 서로의 사이를 좁혔다.


우리의 결정에 몹시 기뻐하던 던과 프란체스카는 나 없이 엄마와 어떻게 하루를 보낼 것인지 벌써부터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프란체스카에게 던은 우선 번역 앱을 사용하자고 했다. 던은 이미 내 생일이었던 날에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번역 앱을 통해 전한 바 있었다.


- 은영은 겉과 속이 같은 아이예요. 착한 딸을 둬서 자랑스럽겠어요.



Day 25. JUL 4, 2024

Ponferrada → Villafranca del Bierzo, 24.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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