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떠나고 싶어

나에게 여행이란

by 은영

"코로나 덕분에 좋은 거 한 가지는 네가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고 나를 신경 써주는 시간이 늘었다는 거야."

엄마는 요즘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엄마가 말하는 내가 돌아다니는 일은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내겐 결코 적지 않은 여행의 이력이 있다. (아마도) 36개국의 여행 경력이 있고, 틈만 나면 국내든 국외든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어디든 떠나버렸다.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는 나는 자연스레 엄마에겐 비밀로 한 여행들도 있었다. 그것까지 엄마가 알았더라면 그 횟수 동안 자신을 찾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게 여행이란 짊어진 가정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벌써 엄마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그려지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때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의 맞딸인 나는 엄마에게 '딸'이라는 존재 그 이상의 역할이 요구됐다. 그렇지만 에어플레인 모드를 실행하는 그 순간부터는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누나라는 존재도 함께 오프(Off)된다. 여행을 하는 순간만큼은 여행자의 신분만이 남는다. 그 신분이 내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가정환경의 이유로는 여행에 중독된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 난 나는 여행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주어지는 여행 속에서 다양한 자극을 느낄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쏟아내고 또 감정을 쌓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여행 중 얻어진 글과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의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다녀와 엮은 나의 첫 책,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을 쓰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했느냐는 질문에 숙연한 마음으로 그렇지 않았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늘 남겨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두말할 것도 없고 문제는 나의 애인들이었다. 그중 한 애인의 결혼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나의 습관적 여행 생활 때문에 사사건건 다퉜던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애인은 서른이 다 되도록 여권도 없었고 해외여행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여행을 왜 다니는 것인지 그 이유조차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도 했지만 매번 여행의 가치 자체를 무시당하고 급기야 "명품백을 사고 내 옆에 있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와 결혼을 고려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나는 더 이상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애인과는 이별을 했다.


사람에 대한 애착이 그리 크지 않은 내게는 떠나는 일에 누군가를 동행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떠올리기가 어려웠고 떠나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홀로 훌쩍 떠나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남겨지는 사람들의 쓸쓸함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외면했을 인물이 바로 나다. 이렇게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이상한 나는 어쨌든 연애를 하는 것보다 여행이 좋다.


그러니 여행을 꿈도 꿀 수 없는 이 코로나 시대가 얼마나 가혹한지 모른다. 지난해 유행했던 말 ‘코로나 블루’는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확신했다.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접어두고 대신 책 읽는 시간을 늘려 갔다. 주인과는 다르게 책꽂이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이윤기 옮김, 2016) 읽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이 양치기를 만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21_11 greek salvia-1.png 그리스의 샐비어


"그런 건 내게도 있어요. 필요한 건 다 있다고요. 빵, 치즈, 올리브, 나이프, 장화 만들 가죽과 송곳, 그리고 병에는 물이 들어 있고. 다 있어요. 담배만 빼고....... 담배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p265)

이 말은 담배를 찾는 양치기에게 주인공이 담배 대신 주머니칼을 주겠다는 말에 양치기가 실망하며 말하는 대목이다. 순간 멍했다. 정말 멍했다. 담배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니. 살아가는데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니. 그 양치기가 못내 부러웠다. 내게는 양치기의 담배와 같은 것이 무엇일까? 답이 없는 고민에 빠져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양치기의 말을 읽어주며 너에게 담배 같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기도 정말 많이 물어보고 다녔다. 그러나 속시원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된 일이 생겼다. 클럽하우스의 헤비 유저인 나는 책 낭독하는 방에 종종 참여하고 있는데 그날 내가 읽은 책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이 방에서도 그 질문을 던져보아야겠다며 양치기의 말을 낭독을 하던 중, 순간 답이 떠올랐다. '아마 그것은 여행이지 않을까?' 하며 내가 찾던 담배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말았다. 그렇다. 내게 여행이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말 허무하게도 그것이 내가 수년간 해오던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챘다. 내게 너무 익숙한 생활이기에 미처 소중함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보다는 오로지 '나'라는 사람만으로 존재할 수 있던 여행. 그 여행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감정을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생각나는 대로 주워 담아보는 시간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내게 여행이 일상의 도피 같은 것 아니냐며 질책하던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괜히 눈물이 났다.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진심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러니까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것이 내게는 여행이다. 그저 취미나 일탈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하늘길이 열린다면 첫 여행지는 아마 그리스가 될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게 해 준 양치기가 있는 그리스로 말이다. 애저구이에 샐비어 술 한잔 기울이며 그 누구도 아닌 그저 나로서 지내볼 것이다. 어김없이 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가 살았던 동네를 거닐며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볼 것이다. 당신에게도 담배와 같은 것이 있느냐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로바니에미,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