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
익숙한 풍경에 괜히 마음이 저릿해졌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다시 온 것이다. 앞으로 시작되는 긴 여정을 응원받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 수많은 영혼이 잠들어 있는 마을의 공동묘지에 고흐 아저씨가 잠들어 있다. 그를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고흐는 〈오베르의 교회〉, 〈까마귀 나는 밀밭〉, 〈최후의 자화상〉 등 걸작을 남겼다. 생애 첫 유럽여행 중, 단지 고흐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찾았다. 그가 그림으로 남겨놓은 것과 꼭 닮은 마을을 누비며 고흐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온 이후로 고흐가 좋아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둔 양 손을 꺼내 바람 사이를 가르듯 휘어잡아 보았다. 죽음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순례를 앞둔 탓인지 이곳이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이곳을 가득 메운 바람이 영혼의 울림이 되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디뎠다. 어느새 나는 그의 앞에 섰다.
"메리 크리스마스, 고흐."
고개를 돌려 그의 옆을 조용히 지키고 있는 테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방금까지 누군가 여기 있었나 보다. 그들의 묘비 앞에 꽃다발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여기에 꽃이 놓여 있었는데, 센스 없이 빈손으로 온 것이 멋쩍었다. 중국어로 쓰인 편지는 읽을 순 없었지만, 보나 마나 크리스마스 인사였을 거다. 다름 아닌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많은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사람들은 그 의미를 헤아릴 새도 없이 기쁨에 젖는다. 왠지 무조건 그날은 즐거워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난 목적 없는 환희 속에서 당연한 듯 행복을 누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스페인의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였다.
떠나오기 전, 이런 질문을 받았다. 왜 하필 그곳이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 같아."
내가 날아온 동쪽을 등지고 일몰을 향해 끝없이 걸어 대서양에 닿는다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작은 쪽지로는 담을 수 없는 긴 이야기를 여기 잠들어 있는 고흐 아저씨에게 전할 수 있겠다고. 머지않아 이 마을을 세 번째로 찾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리를 뜨기 전, 노트와 펜을 꺼냈다. 감히 고흐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지금의 감정을 펜 끝에 실었다. 볼을 굴리며 흘러나오는 잉크가 종이에 스미듯 내 마음을 이 풍경 속에 녹아냈다.
"아저씨, 또 올게요. 안녕."
바람이 부는 고흐의 밀밭 위에서 약속했다.
Auvers-sur-Oise, France
12. 12. 25.
이 글은 필자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독립출판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의 〈고흐의 밀밭 위에서〉를 퇴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