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길

#세계여행 #러시아 #토볼스크

by 은영

시베리아의 수도였던 토볼스크를 여행하는 이튿날이었다. 온몸을 덮던 무거운 아침잠을 걷어내고 분주히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크렘린의 남동쪽에 자리 잡은 작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별안간 산행을 결심한 이유는 이곳에 온 첫날, 총독궁전박물관에서 본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은 토볼스크의 크렘린을 멋지게 담은 풍경화였다. 크렘린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관이 담긴 그림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토볼스크의 크렘린은 구시가지 뒤편에 솟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그림에는 이를 같은 높이에서 혹은 살짝 위에서 본 듯한 구도로 그려져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구시가지로 내려가는 길에 내 오른편엔 크렘린이, 왼편엔 작은 산이 하나 솟아 있었다. 그 산의 언덕 위에서라면 그림을 그린 이의 시선으로 크렘린을 바라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처럼 이번에도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람이 하나 없는 산 길


구시가지로 내려가 무작정 그 작은 산을 오르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지도에도 딱히 이름이 표시되지 않은 산은 입구가 어딘지 분명히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제법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보이는 산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산은 혼자 다니는 게 아니랬는데, 아무 생각 없이 홀로 산에 오다니. 여행만 오면 이렇게 옆길로 새곤 한다. 아침 공기라도 따듯했으면 좋았을 것을. 차가운 아침 공기에 괜히 긴장감이 돌아 쭈뼛쭈뼛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한 남자와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 곁엔 큰 개도 한 마리 있었다. 산 아래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언덕 위 나무 사이로 사람들과 개의 그림자를 봤었다. 아마 그들이었나 보다. 다가가서는 바디랭귀지로 "크렘린, 크렘린!" 하며 크렘린을 볼 수 있는 언덕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남자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유라'라고 소개했다.


유라는 큰 아들 야로슬라브와 둘째 딸 기라 그리고 반려견 그레이트와 함께 산책 중이었다고 했다. 학교를 다닐 때 배운 약간의 영어밖에 쓰질 못하니 이해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것쯤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이미 숱한 여행에서 나는 몸소 배웠다. 나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러시안들에게 배운 러시아 말들을 섞어 가며 나를 소개했다. 그중 하나인 "까레아". 한국에서 왔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키프레이를 담은 꼴라주


"이 꽃, 뭔지 알아?"

흔히 보던 들꽃인 것 같은데 유라가 그렇게 물으니 생경하게 느껴졌다. 유라는 그 꽃이 키프레이(분홍바늘꽃의 러시아어)라고 했다. 차로 마시기 좋은 꽃이라며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기라가 들고 있는 자루에 분홍빛 꽃잎이 가득했다. 유라네 가족은 아이가 여섯이라니 아침 식사에 올릴 찻잎으로 충분하겠구나, 싶었다.

유라의 가족과 함께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혼자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의 색을, 나무에서 떨어지듯 날리던 숲의 향기를,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간 길 끝에서 크렘린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마주했을 땐 긴장감으로 닫혀있던 감각이 모두 열리고 신비한 감동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크렘린을 그린 그림과 그 전경


"어떤 풍경이길래 작가는 화폭에 담겠다고 결심한 걸까, 정말 궁금했어."

내 마음을 빼앗은 그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박물관에는 상당 수의 그림들이 이 크렘린을 담고 있었고 구도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과 매우 유사했다. 다들 여기에 와서 크렘린을 그린 것이었다. 크렘린이 있는 토볼스크의 경관을 담던 작가들의 그림엔 하나같이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이 산을 오르며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을까.


다시 시선이 옮겨졌다. 그레이트는 탁 트인 경치를 배경으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고 그 뒤를 야로슬라브가 쫓고 있었다. 유라는 기라의 날리는 앞머리를 정리해주듯 쓸어 넘겨주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유라의 가족과 함께 크렘린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아침 공기를 마시는 이 순간이. 나도 모르게 눈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유라의 가족을 따라서 걸었던 길



Tobolsk, Russia

19. 7. 14.



키프레이를 보면 떠올릴 유라의 가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떻게 하면 잘 헤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