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잘 헤어질 수 있을까?

#세계여행 #러시아 #모스크바

by 은영
참새 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도심 풍경


어쩌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간 건지 모르겠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거라곤 대화의 흐름이 아닌 감각일 뿐이었다. 오후 내내 내리던 비가 걷히고 태양이 물러간 하늘엔 물기 어린 짙은 밤이 찾아왔다. 우리는 참새 언덕에서 빛이 번지는 도심의 야경을 보고 뒤편의 모스크바 대학교로 장소를 옮겨갔다. 대학교의 가장 높은 건물이 구름에 가리어지는 것을 보곤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높이를 실감했다.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볼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한국과 다른 촉촉한 여름밤공기를 마시며 대학교의 정원을 거닐었다.


아마 그런 질문이었던 것 같다. 매번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하느냐고, 두려운 것도 없느냐면서 희 언니는 물었다. 그런 게 없을 수가 있을까. 나도 사람인데 어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30대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고백을 한 것이다. 사실은 죽음이 두렵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일찍이 죽음을 알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음이 익숙하다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은 내겐 늘 자주 찾아오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얼마 전 외삼촌께서 돌아가셨어요. 오랫동안 아프셨거든요. 그런데 전 외삼촌과 헤어질 거라고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그때 알았어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어렸을 때 목격했던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이 다시 되풀이될 뿐이었죠. 언니, 죽음이란 뭘까요?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걸까요?"


두서없는 내 말에 언니는 침묵을 오래 지키기보다 의외로 간단한 답을 주었다.

"그럼, 어떻게 잘 헤어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네요."


구름이 드리운 모스크바 대학교


나는 반사적으로 언니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이별할 수밖에 없다면, 내가 해야 할 고민은 '어떻게 잘 헤어질 것인가'라는 걸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혼자 상처를 떠안고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겪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Everything Comes and Goes"라는 문장을 찾아냈다. 모든 것은 오고 간다는 것, 만남이 있으면 이별은 당연히 따라온다는 것이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미쉘 브랜치가 꽤 오랜 공백을 깨고 들고 나온 EP의 제목이기도 했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힘들 때면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 노래를 새기고 들었다. 그 문장은 그때 떠난 여정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되었고 내 오랜 여행의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해석하던 20대의 난 참 보잘것없었다.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그 문장을 방패로 삼았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다면 만남 자체에도 그리 애정을 쏟지 않겠다는 것이 그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 문장은 내 안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니, 관계에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을 밖에. 나의 인간관계에는 늘 끝이 예정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지난날을 떠올리니 희 언니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헤어지기 싫어요, 헤어질 거라면 마음도 주지 않을 거예요."는 말 그대로 투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미쉘 브랜치도 그런 의미로 쓴 것이 아닐 텐데… 어디 가서 팬이라는 말은 삼가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언니가 준 힌트는 내 안으로 향해있던 문장의 중심을 살짝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나와 상대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 그 문장을 공유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도록 말이다. 사실, 어떻게 해야 잘 헤어지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혼자 단정 짓고 슬픔에 파묻혀 미래의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 일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


여행은 이런 나의 오랜 물음표에 이런저런 답을 붙여볼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 같다. 혼자 여행하는 것만큼 만남과 이별을 자주 겪는 것이 또 있을까? 어쩌면 그 답을 알고 싶어 계속 여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Everything Comes and Goes"는 나 혼자만의 문장이 아닌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이와 공유할 문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Moscow, Russia

19. 7. 24.



비온 뒤, 모스크바의 여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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