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한 여행

#세계여행 #스페인 #카미노데산티아고

by 은영

"지금도 사진을 찍고 있니? 글은? 훌리랑 종종 네 얘기를 해.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스페인 친구 베드로와 이따금씩 안부를 주고받는다. 무슨 일을 하며 보내는지,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지, 요즘 건강은 어떤지……. 그리고 메시지 끝에는 꼭 "함께 여행하던 때가 그립다."는 말을 덧붙인다. 상투적이지만, 진심을 담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다짐까지 전한다.


13_camino-1.jpg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맞닿아 있는 생장피드포르


2012년의 겨울, 베드로를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장피드포르에서 만났다. 생장은 스페인의 순례길 카미노 프란세스의 시작점이다. 베드로는 친구 훌리아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보통의 대학생이었다. 휴학 중이었고 복학을 앞두고 있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전, 길게 여행할 곳으로 이 길을 찾은 것이었다. 순례자답게 어깨에는 12kg 무게의 배낭을 메고 있었고 또, 순례자답지 않게 목에는 덩치 큰 카메라를 걸고 있었다. 순례길은 세상의 욕심을 덜어내기 위해 오는 곳인데 화질 좋은 사진을 찍겠다며 가져온 DSLR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훌리아는 내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며, 작은 화면으로 보이는 사진에 "부에노!"(좋다!의 스페인어)라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나중에 크게 보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알베르게(숙소의 스페인어) 공용 휴게실로 나와 그날 찍은 사진을 보며 일기를 쓰곤 했다. 와인 한 잔이 1유로도 하지 않는 탓에 우리는 매일 취해 있었는데 나는 혈중 알코올 농도와 상관없이 쓰는 일을 건너뛰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온 상태로 라틴어와 조형적으로 거리가 먼 한글을 보며 베드로는 도저히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에게 한글은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나는 그 점이 편했다. 얼핏 봐도 대충 문장을 훑어볼 수 있는 한국인 사이에 있지 않으니 누가 보던 말던 언제 어디서나 일기장을 꺼내놓고 내 생각을 빼곡히 담을 수 있었다. "이건 뭐라고 쓴 거야?" 하고 일기장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베드로가 물으면, 나는 솔직하게 번역해주지 않고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네 손글씨처럼 재밌다."며 감상하듯 일기장을 바라봤다.


"근데 왜 이렇게 매일 쓰는 거야?"

하루에 이삼십 킬로미터를 걷는 고단함 끝에서 일기장과 카메라를 놓지 않는 나를 보며 베드로와 훌리아는 마냥 신기해했다. 그때마다 어물쩡 답을 피하는 내게 그는 오늘만큼은 꼭 이유를 듣고야 말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일단 와인을 한 모금을 들이켰고 이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절대 웃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해."

"응, 알겠어. 말해 봐."

"나… 한국에 돌아가면, 책을 쓸 거야. 여행기를 쓰려고."


당시 나는 시각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주로 활자를 다루는 매체에 관심이 많았고 종이의 촉감을 좋아해 편집디자인을 선택했다. 디자인 일에 만족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글만 디자인하는 것일까? 내가 쓴 글이 디자인의 재료가 될 수는 없을까? 음식으로 치자면, 담는 그릇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까지, 심지어 농사까지 직접 하고 싶었다. 글을 쓸 때 느끼는 감각을 시각화하는 것.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언젠가 시도해보리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때,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운이 좋게도 복학 후 해야 하는 졸업작품은 직접 쓴 글을 디자인하여 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용을 고민하던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이 제법 되었고 좋아하는 여행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상상으로 그치던 일을 해보리라, 나만의 글을 찾으러 여행을 떠났다.


요령이 없었기에 일단 모든 걸 기록하기로 했다. 나는 평소에도 인상 깊었던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흩어져버리는 느낌이 드는 게 싫어서다. 지금까지 그것을 그림으로 풀어내었다면 이제는 글로 남기게 된 셈이다.


"이건 우리 순례의 첫날에 네가 날 도와줬던 일을 쓴 거야."

나는 베드로가 읽을 수 없는 일기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드로는 피레네 산맥에서 미아가 될뻔한 나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미 한참을 앞서 갔다고 생각한 베드로가 배낭도 없이 맨몸으로 나를 향해 뒤돌아 오고 있었다. 알베르게에 짐을 두고 왔다며 되찾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순례길을 얕잡아 본 탓에 당장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든 상황이었다. 평소 등산도 안 하는 주제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첫날부터 해발고도 1,300미터의 산을 넘고 있냐며 속으로 미련한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 코가 석자임에도 그를 위한답시고 "그거 참 안된 일이네." 하며 힘내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베드로는 내게 웃으며 말했다.

"네 배낭 나한테 줘. 저기 보이는 고지까지만 들어줄게. 다들 저기서 널 기다리고 있어."


알고 보니 나를 앞서 간 유럽인끼리 저 뒤쳐지는 순례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그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나를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날의 일을 "한국에서 온 작은 소녀가 바람에 맞서 싸우고 있었지." 하며 회상하곤 한다. 그랬다. 바람이 정말 거셌고,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해서 무척 흐렸다. 막판에는 비까지 와서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하산했으니 자연과 정면승부를 본 날이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길 위에 동료가 생겼으니 일기장에는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따듯했던 날로 기록했다.


13_camino-2.jpg 피레네 산맥에서 여유를 되찾은 후, 베드로와 함께


팜플로나에서 베드로와 훌리아의 여러 친구를 만나 길에서 밤새도록 와인을 마신 일, 스페인의 전통대로 열두 시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을 하나씩 입 안에 욱여넣으며 새해를 맞이했던 일,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훌리아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찾아와 나의 완주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어준 것까지……. 사십일 가량 되는 여정의 중대사를, 사소하게는 그날 먹은 아침 식사, 생소한 지명, 하나 둘 새롭게 알아가는 스페인어를 생생하게 적었다. 종이에 검은 펜으로 눌러쓴 기록은 머릿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 만든 책 일몰을 향해 가는 길이 되었다.


독립출판《일몰을 향해 가는 길》

책의 디자인 콘셉트는 순례길 그 자체로 삼았다.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걷는 이 길의 특징을 담아 책 제목을 지었다. 목차 역시 일출에서 일몰까지 그리고 새로운 일출로 이어지도록 시간 순으로 구성하였다. 힘겨웠던 순례길의 여정을 디자인에도 투영하고 싶었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세로 쓰기 방식을 적용했다. 가로 읽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세로로 글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책을 만들고 나서 불평하는 독자를 여럿 만났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디자인 의도였다. 순례길 자체가 쉽지 않은 길이기에 쉽게 읽히는 책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배낭의 무게를 진 자가 걷는 속도에 맞춰 읽는 책이다. 또한, 세로 쓰기로 책을 만들면 책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겨가며 읽게 된다. 즉, 책을 읽을수록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듯한 순례길의 공간감을 주어 독자도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순례길의 안내 역할을 하는 화살표에서 모티브를 얻어 별색으로 노란색을 사용했다. 덕분에 노란 이미지로 쉽게 각인이 되는 책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볼 때마다 모자람 투성이지만, 쓰기의 시작을 열게 한 애정 있는 책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단순히 내가 쓴 글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시작한 쓰기는 의외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글을 쓰면서부터 언제 어디서든 시간 여행이 가능했다. 이를 테면, 베드로와 헤어지는 순간을 문장으로 옮기면 나는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베드로는 울보였다. 얼마나 울보였냐면 나보다 더 자주 울었다. (아마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울보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베드로는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인사를 하다 말고 나를 안아 들었는데 소심쟁이의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나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꼭 아니, 꼬옥 안은 베드로가 애써 울음을 참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마저 울면 그가 나를 따라 엉엉 울 것 같았다. 서운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를 웃으며 보내주었다.


정지한 화면처럼 "그때 참 슬펐는데."로 떠올리고 마는 순간을 이렇게 글로 쓰면 동영상의 프레임 단위로 섬세하게 재생할 수 있었다. 이제는 디자인의 재료를 찾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 쓰기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쓴다.


22_3 all the time writing.png 언제 어디서나 글쓰기


나의 소중한 날을 하나 둘 간직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내가 쓰기를 시작한 이유다. 주로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할 때 쓰고, 요즘에는 여행을 하지 않아도 쓴다. 길지 않은 내 인생에도 굴곡이 있어 그 골짜기를 여행하며 쓰는 것이다. 그날의 온도, 색채, 호흡, 그 모든 것을. 게다가 종이로 옮겨 놓으면 손으로 기억을 어루만질 수도 있지 않은가. 흐려진 기억도 이미 써 놓은 글을 읽으면 되살아나니, 정말 매력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제 쓰기는 내게 놓지 못하는 일이다.




Camino de Santiago, Spain

12. 12. 26. - 1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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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며 여행했던 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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