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몰타 #슬리에마
몰타에서 다닐 어학원을 등록한 후로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곳에서 보낼 백 일간의 여정을 떠올리면 어두운 밤에도 정신이 말짱해지곤 했다. 평소와 다르게 여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생활을 하며 보낼 곳이라 그런지 몰타에서 머물 집에 대한 기대감도 매일 조금씩 커져갔다. 지중해에서 불어온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경쾌한 색 배합으로 페인트 칠이 된 벽, 그곳에 걸린 몰타의 풍경을 담은 액자, 방 곳곳에 배치된 빈티지한 남유럽 양식의 가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낭만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어학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를 등록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발품을 팔아 집을 얻어볼까 했지만 가장 현실적인 안으로 타협하고 만 것이다. 몰타에 도착한 첫날, 예상한 대로 무미건조한 호텔방이 나를 반겼다. 무거운 블라인드, 개성 없는 하얀 벽,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무난한 가구가 공간을 차지했다. 지중해의 'ㅈ'도 찾아볼 수 없는 인테리어. 이런 곳에서 매일 자고 먹으며 백 일을 보낸다는 사실에 아찔해졌다. 이 공간에 감성 수혈이 매우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바로, 응급처치에 돌입했다.
"이 근처에 꽃집 본 적 있어요?"
얼마 전 어학원에서 안면을 튼 J에게 S.O.S를 쳤다. J는 얼마 전 해변을 따라 걷다가 꽃 트럭을 봤다고 했다. 내게 지도 앱에 들어가 보라고 하더니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즈음 일거라며 어학원과 해안도로의 사잇길을 짚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J가 별표를 쳐준 위치로 갔다. 정말 그 자리엔 어느 사내의 꽃 트럭이 있었다. 4인용 가정 식탁과 의자를 실으면 채워질 정도의 작고 아담한 트럭이었다. 무심해 보이던 그는 내가 편하게 자신의 트럭을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을 아꼈다.
언젠가 키워보고 싶었던 우주목에 시선이 갔다. 슈렉의 귀 모양을 닮아서 우리나라에서도 무척 인기가 많은 다육이다. 독특한 모양새가 정말 귀여웠다. 플라스틱 분에 담긴 모종을 들어 보이며 다른 화분은 없냐고 그에게 물었다. 자신의 창고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다음날 다시 보기로 했다.
약속한 날, 우주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사내는 날 보자마자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깜박했노라고 이실직고했다. 급한 일이 아니니 내일 다시 오겠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다음 날 같은 시간에 그의 트럭으로 갔고 그는 내게 자그마한 토분을 내밀었다.
"그래, 이거면 딱 좋겠다."
손이 투박한 사내는 흙을 꾹꾹 눌러 담으며 화분에 우주목을 옮겼다. 섬세하지 못한 그의 손놀림에 괜히 웃음이 났다. 어떤 이유로 이 일을 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이유를 모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주한 그의 손을 따라 소란스러운 생각이 오가는 동안 우주목은 안정감 있는 새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할게요."
나는 노란 거베라를 가리켰다. 그는 단돈 50 센트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겨울엔 한 송이에 만원까지도 부르는 것이 거베라인데 겨우 50센트라니! 한 손엔 우주목을 다른 한 손엔 거베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오자마자, 몰타로 오는 길에 여행했던 러시아에서 산 테이블보를 탁자에 깔았다. 우주목 화분이 놓일 자리였다. 그 옆엔 다 쓴 생수병에 물을 채워 거베라를 꽂아 두었다. 거베라 줄기 끝을 살짝 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트에서 사 온 백합향 초에 불을 켰다. 노란 조명이 비추는 방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어느 곳이든 머무는 곳을 집(Home) 답게. 이건 내게 포기할 수 없는 영역 중 하나다. 호텔, 숙소, 기숙사라는 말보다 집이라는 이름으로 이 공간을 부를 수 있도록 모양새가 갖춰졌다.
그 주의 주말, 하우스 키퍼 자넷이 내 방에 노크를 했다. 우주목을 발견한 자넷은 청소를 하다 말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귀엽게 생긴 건 뭐냐는 흥분의 목소리가 방을 메웠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넷,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날 이걸 네게 주고 갈게."
우주목을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이 녀석을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는 때를 생각했다. 나보다 더 오래 머무는 어학원 친구에게 주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사람이었다. 자넷은 여기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나를 잇는 주인으로 아주 제격인 인물이었다. 자넷이라면 오랫동안 우주목을 지키며 물을 주고 햇빛을 챙겨줄 수 있을 거다. 정말 잘 된 일이었다.
거베라가 지면 리시안셔스를, 리시안셔스가 지면 장미를, 장미가 지면 튤립을 사러 난 그 트럭을 자주 들렀다. 매번 한 송이씩 사가는 나를 귀찮아하지 않던 그 사내는 어떤 날은 내가 지불하는 작은 돈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지갑을 열면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그냥 가져가라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몰타의 꽃 값은 왜 그리도 싼 것인지 지금도 알 순 없지만, 다시 꽃을 사러 올 때 함께 돈을 내겠다는 말로 그의 후한 인심에 응하곤 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이 아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냈던 곳, 몰타. 나는 그 사내의 트럭에서 1유로도 되지 않는 돈으로 윤기 있는 일상이 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Sliema, Malta
19. 8. 17. - 19.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