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고민하던 시기, 상담을 권유한 회사 동료 금순님이 있다. 상담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반짝이는 눈으로 상담은 어땠는지 물으면 나는 답하곤 했다.
“오늘 세 번째 상담을 받고 왔어요.”
“어땠어?”
“제가 쓴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금순님은 진은영 시인의 <어울린다>를 한참 읽더니 어렵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가 너무 어려워.“
“시는 어렵지만 ‘너에게 ~어울린다’ 구절만 차용해서 쓰는 거라 제가 쓴 시는 쉬워요. 제가 쓴 시 보여드릴게요.“
시를 읽은 금순님이 감상평을 남겼다.
“알 수 없는, 쌀랑한, 경주마, 터널 속, 고독, 갇혀 외로워진, 끝맺음, 앙상한 가지만 남은. 무언가 결론이 있고 정답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네.“
정답을 바라보고 있다고?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우울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네게서 못 느꼈는데 신기하네.”
“아마 제 안에 잠재되어 있던 불안이 시에 드러난 것 같아요.”
“어떤 게 불안해?“
내게는 이런 게 불안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싶을 만한 불안이 있다. <돈>. 돈이 없어 내 삶이 무너지고 불행해지는 게 무엇보다도 끔찍한 사람이 바로 나다.
“우리 때는 어렸을 때 다 어렵게 자라지 않았어? 나도 그런 걸?”
“금순님과 제 차이는 아마 결핍에서 오는 좌절감 유무인 것 같아요.”
“좌절감? 구체적으로 어떤 거?”
“중학교 1학년땐 메이커 운동화가 갖고 싶었어요. 체육시간 운동장에 나가면 친구들은 다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그거 어디 거야?’ 묻고 다녔거든요. 근데 저는 시장에서 산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요. 그게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그 나이에는 다 그렇잖아요. 친구들이 롯데월드를 가자고 하는데 입장권 살 돈이 없어서 못 간다고 했어요. 이런 결핍들이 계속 쌓였어요. 고등학교 때는 MP3가 너무 갖고 싶어서 일주일에 만원 받던 용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삼성 MP3를 샀어요. 그런데 같은 반 친구가 근사한 아이팟 3세대를 목에 걸고 나타난 거예요. ‘아, 난 어떻게 해도 이걸 뛰어넘을 수 없구나.’하는 좌절감에 괴로워했어요.”
“왜 유독 너에겐 결핍으로 왔을까?”
“저는 욕심이 많은 아이였고 지금도 그렇거든요. 하고 싶은 것도 늘 많았고, 갖고 싶은 것도 늘 많았어요. 그런데 그 시기마다 돈 때문에 늘 좌절하는 거예요. 스무 살이 되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을 땐 내가 벌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하지만 상황은 더 녹록지 않았죠. 그래도 악착같이 모았어요. 덕분에 내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감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 두려워요.”
“불확실하기 때문에 너무 기대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하잖아!”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의 사고범위 안에 있을 수 없는 대답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