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기간을 이용해 미용실에 다녀왔다.
설 전날 거리에는 활발함이 가득했다.
꽈배기 도넛 가게, 서너 개의 브랜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커피점, 포장만 되는 크루아상 가게...... 모두가 줄 서서 주문하고, 기다리는 풍경이 '지금은 대목'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내 눈에 도드라지게 들어오는 우리 동네 떡방앗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스티로폼 접시에 담겨 포장된 떡을 두세 종류 사는 사람, 박스에 포장된 많은 양의 떡을 받아가는 사람(예약했겠지), 여전히 포장된 떡이 놓인 매대에서 망설이는 사람, 약밥, 가래떡, 증편, 영양떡, 인절미...... 방앗간 밖에서 아이 마냥 유리벽에 얼굴을 대고 안에 진열된 떡 한 번 보고, 떡 계산하는 사람들 한 번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누나, j는 연휴 시작 전날 퇴근하면 진영(외가 삼촌댁)으로 바로 와야 한다고 해줘."
"영이(언니)하고 열이(동생)도 같이 보낼게."
"아니, 영이는 보내지 마라. 몸도 약하고, 일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더 만들고 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방앗간에서 송신스럽다. 근데, j는 꼭 보내야 된다. 꼭."
해마다 명절 전이면 떡방앗간 하시는 외삼촌과 친정 엄마의 익숙한 대화였다.
우리 삼 남매는 일 년에 두 번 명절 대목 방앗간 도우미 역할을 해왔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세 살이었는데 삼촌과 숙모는 힘도 세고, 몇 마디 지시하면 알아서 움직이는 나를 꽤 미더워하셨다. 반면 언니는 도와드리고자 하는 의욕은 충만한데 비해 금세 "아야!" 하는 앓는 소리가 나오고 무엇보다도 한 가지를 시키면 일 시작 전에 질문만 끊임없이 해대니 불같은 성질의 삼촌으로서는 어금니 깨물고 "끄~응"하는 모습이 종종 연출되곤 했다. '큰 조카가 제발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얼굴에 다 보일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언니는 '돕고 살아야 한다.'는 본인의 가치관에 충실한 나머지 삼촌과 숙모의 화를 지폈다.
어느 해 명절, 동생은 군복무 중이었고, 나는 지독한 몸살로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언니 혼자 방앗간으로 갔는데, 그날 오후 늦게 언니가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올해 주문이 많이 안 들어와서 괜찮다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래."
언니의 말에 엄마는 매출이 신경 쓰여서 삼촌에게 전화를 했더니,
"j도 없고, 영이 혼자 있으면 일만 많아진다. 그래서 둘러댄기다. 처형하고 처남도 있으니까 괜찮다."
방앗간에는 항상 나보다 먼저 온 분들이 계셨다.
숙모의 언니, 형부, 오빠. 이 세 분은 명절 연휴 때마다 어김없이 도와주셨다.
내가 방앗간에 들어서면 "사돈처녀 왔네! 잘 지냈어요?" 하면서 앞치마를 건네주셨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는 떡시루 쪽에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는 삼촌과 입술이 짓이겨진 숙모가 재료를 계량하면서 작업에 몰두하고 계셨다. 밤새도록, 그야말로 밤새도록 삼촌과 숙모가 지시하는 과업을 수행하고 한 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새벽장이 시작되는 즈음에 스티로폼 접시에 포장된 떡을 방앗간 밖에 마련된 매대에 옮겨 하루 종일 포장떡을 판매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반나절이 지나가면 종아리가 붓기 시작하고, 잠시 앉을라치면 삼촌의 잔소리에 벌떡 일어서서 "떡 사세요!"를 외쳐댔다. 추석에는 그나마 밖에서 판매하기가 수월했는데, 설에는 너무 추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더 살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안에서는 포장떡이 계속 만들어지고 '제발 그만 좀 만들어라.'하고 마음속으로만 으르렁 거렸지만 결국 저녁쯤에는 더는 떡이 없어서 팔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만큼 수요가 많았고, 삼촌과 숙모에게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대목을 놓칠 수 없는 확실한 기회임을 증명하듯 포장떡 판매 매출이 꽤 괜찮았다.
해 질 녘이면 삼촌과 숙모의 입만 바라봤다.
"j, 수고했다. 이제 집에 가 봐라." 이 말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편과 교제를 시작하던 스물일곱 살, 그 해 추석이 시작될 즈음,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추석에 계획한 일정 있어요?"
"아, 외가 삼촌께서 떡방앗간 하시거든요. 명절 때마다 연휴 시작되면 명절 전 날까지 방앗간일을 도와드려요. 거기 가봐야죠."
"네? 아...... 네."
훗날 남편이 말하기를 추석에 부모님 한 번 뵙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려고 했단다.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는데 난데없이 떡방앗간에 가서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가지마라고 할 수도 없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고.
스물여덟 살 봄, 나는 결혼했고 더는 삼촌을 도와드리지 못했다.
"시집간 조카를 어떻게 부를 수 있나, 근데 j가 시집가고 나니까 내가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고 염치없지만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열심히 운영하신 덕분에 삼촌과 숙모는 자리도 잡으시고 또 투자가 잘 되어 금전적으로 많은 여유를 가지게 되었지만 6년을 더 운영하시다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시고 방앗간을 정리하셨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진열된 포장떡이 예뻐서 사람들 북적대는 방앗간 안으로 들어갔다. 떡시루가 있는 안쪽에서는 몇몇의 사람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고, 파티션 밖에서는 여자 두 분이서 분주하게 포장떡을 판매하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사람은 카드 결제를, 한 사람은 봉투에 넣어주며 척척 진행하고 있었다. 이십오 년 전, 진영 시장 안 떡방앗간 입구에 서서 "떡 사세요!"를 외치던 내가 보였다. 만 원 권, 천 원 권을 주고받으며 앞치마에 돈을 쑤셔 넣고 두 손을 모아 호호 불던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약밥을 한 개 집어서 계산하고 매대에 진열된 떡을 사진 찍어도 되는지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약밥을 나눠 먹으면서 그때의 기억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내 눈가는 젖어있었다.
"j 씨, 난 그때 진짜 황당했다고요. 용기 내서 부모님께 인사드리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떡방앗간이 불쑥 튀어나와서...... 근데, 약밥 참 맛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