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측도 변환

by 솔벤시

결국 나는 ‘먹고사는 길’을 택했다.

학부를 졸업하면 석사, 박사, 연구원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곳에서,

나는 교수님과 동기들에게 ‘반동분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대신, 그 업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구차한 단서를 덧붙였다.

지금 돌아보면 엘리트 집단에서 배운 건 수학이 아니었다. 엄밀함과 열등감이었다.


구직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학교는 나를 막지는 않았지만 밀어주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결국 영리 활동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들에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은 길어지고, 길어진 말은 항상 변명처럼 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쓸모가 바뀐 나는 설명 대신 증명하기로 했다.


먹고사는 질문은 그때부터 더 구체적인 무게를 가졌다.

숫자가 좋았던 나는 금융대학원 같은 방향을 떠올렸지만,

작지 않은 대학원 진학 비용 앞에서 선택지는 빠르게 얇아졌다.

내 힘으로 증명하기 위해 선택한 길에서 또다시 부모님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계리사라는 직업은 그 얇아진 선택지 위에서,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시험’이라는 형태가 있었고, 시험은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군대에서도 일과를 쪼개 문제를 풀었고, 전역 후에는 주말마다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인생에서 가장 신체 건강이 완벽한 군인 시절 책과 씨름한다는 건 어쩌면 비합리적이었다.

선임들은 외출과 휴가 중 여자들과 보낸 시간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거나,

PC방에서 서로의 전략과 반응 속도를 겨루기도 했다.

일부는 나처럼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즐기는 법을 함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을 동시에 못 했다. 그래서 하나만 택했다.


자격시험공부는 수학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작위적으로 암기해야 하는 수십 년 전 판례들에는

명확한 단일 원칙보단 수많은 예외들이 즐비했고,

이과생의 눈에 그저 ‘거래’ 일뿐인 활동은 매출채권 따위의 회계 항목들로 쪼개져 기록되었다.

다행인 점은, 자격시험은 ‘경쟁’의 관점에서 쉬운 편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올백’을, 중학생 때는 ‘전교 5등 이내’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선 ‘엘리트 평균 이상’을 목표로 공부했지만 자격시험의 문턱은 그보다 낮았다.

학원가의 일부 학생들은 그 느슨한 문턱의 함정에 빠져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 않았다.

문제집을 펼쳐 놓고도 오래 웃었고, 가끔은 문제 하나를 푸는 것보다

친구들과의 담소를 더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간절하지 않음이 나의 승률을 높여주는 변수가 되었다.

나는 그런 판에서 유독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방심이 주는 안정감이 싫으면서도, 그 안정감 위에서만 다시 속도가 나오는 날이 있었다.

승부욕은 늘 내 편이었다. 다만 그 편이 되는 방식이, 썩 고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로 계리사가 되었다.

나는 학계와는 쓸모가 달라졌지만, 적어도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턴 구직 활동은 시험공부와는 달랐다. 시험처럼 출제 범위가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저 허공에서 두 연필의 끝이 마주칠 확률로 회사의 인재상과 나의 역량이 같길 기대해야 했다.

나는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페를 뒤지고 게시판을 훑고, 검색창에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넣었다.

‘국제 정합성’이라던가 ‘자본 효율화’ 같은 둥둥 떠다니는 말들을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얼렁뚱땅 인턴 면접을 준비했고,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


학계에서 벗어난 ‘탈출구’라고 하기엔 인턴 생활은 너무 근사했다.

동기들은 제각각 똑똑했고, 모두가 각자의 사정으로 나 정도의 동기부여가 있었다.

시험에서 배운 지식을 끌어다 쓰는 산출 업무가 주어졌고, 나는 그 적당한 전문성에 안도했다.

처음 받은 월급으로 사 먹은 나만의 피자, 회식 자리의 비싼 참치회와 고급 사케 같은 “사회인의 맛”은,

어쩌면 사회인의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정규직 취업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자연스레 ‘신의 직장’에 눈을 돌렸다.

업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던 나의 다짐은 허풍이 아니었다.

학계를 벗어난 탕아 주제에 최고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지난날들의 선택과 노력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회사 홈페이지를 뒤지고 뉴스와 재무제표를 뜯어보고 자기소개서를 고치길 반복했다.


최종 면접장에서는 너무 간절한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면접관의 질문이 다가왔다.

“그동안 이력을 볼 때 대학원에서 더 공부를 했어도 될 텐데 왜 취업을 하려고 하나요?”

지난 수년간 나의 방황을 간파한 듯한 질문이었다.

보험계약자를 보호하고 산업으로써 공익에 기여하겠다느니 하는 변명을 늘어놨다.

스스로의 거짓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와중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했다.

신의 직장에 들어가서 나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고집만 진심이었다.


합격 소식은 생각보다 조용히 왔다.

정장을 사러 갔던 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밖에서 엄마와 점원의 대화가 들렸다.

“우리 아들은 그러니까… 증권사 취업했어요.”

보험사라는 단어는 설명을 요구했고, 계리사라는 단어는 더 긴 설명을 요구했다.

내가 통과한 시험과 내가 삼킨 말들은 ‘증권사’라는 단어 하나로 눌려 납작해졌다.

나는 그 편리한 오역 뒤로 숨기로 했다.


그렇게 첫 출근날이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답지가 없는 시험이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조건부 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