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차 하나 제대로 못 빼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골프장 주차장에서 상사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2종 보통 면허에 소형차만 몰아본 나는 7인승 카니발을 출차하는 데 유난히 시간이 걸렸다.
“거래처에서 기다리시잖아. 빨리 씻고 나와서 차 빼두고 대기했어야지. 씻는 건 왜 이렇게 늦었나!”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반응은 그것뿐이다.
눅진한 땀은 물로만 대충 씻어내고 나왔어야 했다.
폼클렌징과 비누로 씻고, 스킨과 로션까지 바르느라 늦고야 말았다. 여름이었다.
신입사원 티를 채 벗지 못한 시절 나는 골프를 시작했다.
거래처와의 식사 자리에서 아직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럼 이제 쳐야겠네”라는 단답과 함께 석 달 뒤 라운딩 일정이 잡혔다.
부랴부랴 레슨비를 내고 장비를 샀다. 퇴근 후의 시간은 전부 골프 연습에 썼다.
손가락 피부는 벗겨지고 손목과 갈비뼈는 시큰거렸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실력이 거의 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라운딩 당일, 막내의 하루는 새벽 네 시에 시작된다. 30분 안에 씻고 외출 준비를 한다.
편의점에서 상사들이 마실 커피와, 라운딩 중간에 먹을 간식을 고른다.
캐디 몫까지 포함해 다섯 개. 당은 적고, 너무 딱딱하지 않은 걸로.
카니발을 몰아 상사들의 집으로 간다. 한 명씩 태운다.
목적지는 컨트리클럽, 운전 시간은 약 한 시간 반.
도착하면 짐을 내리고, 라커 위치를 확인하고, 뒤처지지 않게 따라다닌다.
공을 친다. 대부분은 땅으로 굴러간다. 가끔은 허공을 가른다. 치고, 뛰고, 다시 치고, 또 뛴다.
“뒷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캐디의 말에 고개를 든다. 거래처와 상사들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 시선 앞에서 스윙은 더 굳어간다. 결국 스코어는 세 자릿수를 넘긴다. 라운딩은 그렇게 끝난다.
느긋하게 씻고 나온 주제에 차도 매끄럽게 빼지 못한 나는 다시 한번 호통을 듣는다.
점심을 먹고 상사들을 집에 내려다 주고 나면 오후 다섯 시. 주말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다.
집에 도착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바닥에 눕는다. 새벽부터 이어진 긴장이 풀리자 눈이 감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권력에 굴복하는 일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들에게 공손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날 밤 기숙사에서 단체 기합을 받았다.
그들 중 누구도 군대를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왜?”라고 묻는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게 규칙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더 쉬웠다.
이후 학생회장이 된 나는 선배의 자리에 서자 알게 됐다.
기합은 비합리적이었지만, 조직을 장악하는 데는 가장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도구였다.
나는 그 비효율적인 전통을 증오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후배들을 줄 세우는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느 주말, 나는 형과 테니스를 치고 집에 돌아왔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를 흉내 내며, 라켓을 휘두르던 오후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영어 단어를 미리 외워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발이 날아왔다.
“학생이 공부 아니면 다 노는 거지. 숙제도 안 해놓고 노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형과 나란히 벌을 서는 동안, 시간은 이상할 만큼 느리게 흘렀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급해졌지만, 그 말을 꺼내는 쪽이
더 큰 벌을 부를 것이라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여태 차 하나 제대로 못 빼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어두운 거실 한복판에서,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