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건 뭐의 전개도예요?”
전개도라니, 아버지는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웃는다.
어린 아들의 손에는 오밀조밀 벗겨진 귤껍질이 있다.
“그건 구(球)의 전개도라는 거야”
수업 시간에 구(球)를 배운 적 없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귤껍질에서 전개도를 연상해 낸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조금 대견해졌다.
여섯 살 무렵, 나는 내 이름 석 자보다 숫자를 먼저 썼다.
1부터 100까지 모든 숫자를 써보는, 어머니가 권유한 '숫자 놀이'였다.
1 다음에는 2, 그다음에는 3이 오고, 9 다음에는 자릿수가 바뀌었다.
열 칸씩 줄을 맞추면 종이는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100까지 쓰고 나니 가로 열 칸, 세로 열 칸의 정사각형이 완성됐다.
아름다웠다.
그쯤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집에 있던 책들은 대부분 교육서였다.
천재 수학자의 일화, 가난하지만 꿈을 이뤄낸 학생의 자기 계발서.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며 나도 저쪽 세계에 속해 있을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부모님은 교과서 대신 다른 문제집을 내밀었다. 올림피아드 문제였다.
교과서 문제는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지만, 올림피아드 문제들은 달랐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답지를 펼쳐 봤지만 답이 아니라 다른 언어처럼 느껴졌다.
주변에는 그런 문제를 별다른 망설임 없이 푸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와 그들 사이에 분명한 간격을 보았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특목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내신 성적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영재라는 말에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서를 썼고, 운 좋게 합격 통보를 받았다.
중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은 동네 인문계 고등학교로 흩어졌다.
나는 집을 떠나 기숙사로 들어갔다.
나는 영재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영재학교에서 처음 받은 수학 시험 성적은 '평균 이하'였다.
시험지를 돌려주며 선생님은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엄밀성이 더 중요하다.”
아이디어조차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결론까지 연결하는 논리가 부족했다.
그 이후로 나는 문제를 얼마나 빨리 푸느냐보다 어디까지 납득 가능한가를 스스로 검열하게 됐다.
나는 평균 이하로 시작했고, 평균 근처의 성적으로 졸업해 국내 명문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에는 나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깊게 사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해석하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무렵, 어릴 때 상상하던 모습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았다.
자기만의 이론을 만들어 이름을 남기는 삶.
그 세계에서 나는 항상 두 번째 줄에 서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이 정도의 똑똑함으로는 그 세계의 중심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서야 덜 밀려나는지부터 생각하게 됐다.
나는 추상적인 학문의 세계를 떠나, 손에 만져지는 숫자의 세계로 숨어들기로 했다.
나는 계리사 자격증 책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