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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누군가의 빛이었다

2018.01. 겨울

by 토니

“뭐 해?’


오늘도 어김없이 와준 너의 문자.

너는 결코 모를, 나의 내일을 버티게 해 준 너의 문자들.




어디부터 시작이었을까

그저 가장 친한 친구의 친구.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묶이게 된 매듭이었다. 아직 키가 작았고 소심했던 나를, 너는 엄청 귀여워했지. 보살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때때로 곤경에 처해서 난처해할 때 나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외동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누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도 너를 엄청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밝지도, 당당하지도 못했기에 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넌 계속 날 찾아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여느 어린아이들처럼 빠르게 친해져 갔다.


하지만 한 학년이 지나 새로운 봄이 찾아왔을 때, 더 이상 접점이 없어진 우리의 매듭이 풀린 듯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점점 서로를 찾는 일은 줄어들었고. 매 새 학년이 그러하듯 각자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너의 이야기는 더 이상 너를 통해서가 아닌 간간히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들려왔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친구 중 한 명을 통해 너도 같은 학교에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몸은 전보다 커졌지만 널 처음 만난 중학교 1학년때와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눈물 많고, 쉽게 약해지고, 자신감 또한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내가 새로 배정받은 반은 전부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내 내향적인 모습을 금세 눈치를 채고 나를 은근히 깔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아이들의 기세에 눌려 또 도망만 다니기 바빴다.


학교에선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하교 시간만 기다렸다. 하교한 이후에는 만나고 싶던 친구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 시간들이 쌓여갔고 나의 반보다 다른 학교로 간 중학교 시절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니 당연히 학교에서는 점점 겉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학교에서 너를 다시 마주쳤다.


넌 여전했다. 여전히 밝고, 여전히 당당했고, 여전히 너의 주변은 사람으로 북적댔다. 옆에 아무도 없던 나는 부끄러움을 느껴 쭈뼛거리고만 있었는데 너는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날부터 너무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냐고 연락도 해주었다. 사실 그때, 열등감 덩어리였고 생각이 꼬여있던 나는 나와 달리 너무 잘 사는 듯 보이는 네가 조금 질투 났다. 나랑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괜히 속으로 삐죽 댔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깡조차도 없었거니와, 사실 그때, 정말 많이 반가웠다. 여전히 네가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 풀렸던 매듭을 다시 이을 핑계가 생겼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그날부터 우린 많은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이제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이야기들이 더 많아진 우리는 예전처럼 쫑알쫑알 서로에 대해 따라 잡아갔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사소한 질문부터 새로 생긴 취미들까지 공유했다. 그 당시 난 뉴에이지 피아노 음악에 빠져있었고 공교롭게도 너도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의 곡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중학생 때에는 너무 멀다 생각해 나누지 않았던 진로에 대한 건설적인 이야기들까지. 나는 여전히 하염없이 꿈 없는 공부만 해 나가는 아이였지만 넌 춤에 관심이 생겼다고. 춤이 재밌다고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마냥 밝고 긍정적인 줄로만 알았던 너도 아픔이 있고, 걱정이 수없이 있다는 걸, 하지만 그 걱정에 힘들어하는 시간보다 극복해나가려 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부 새로운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널 보면서 또 한 번 동경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너의 연애사, 나의 짝사랑 등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너를 보면서 나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변해보고 싶어졌다. 너한테 당당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단지 다시 친구가 생겼다는 이유로 자기 비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기 시작했고, 너를 닮고 싶어 친절하지만 단호해지는 법 또한 배워갔다.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연습했고 용기를 내어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다가가려 하였다.

너도 모르는 새에 너는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금 온 너의 연락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어쩌면 또 애써 맺은 매듭이 또 풀려버릴까 봐 무서웠다.

사실 매듭이 풀려버리는 것보다. 내 말을 듣고 난 후의 네가 보일 반응이 더 두려웠다.


멀리 유학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는 어떤 반응일까.

조금은 슬퍼해줄까? 아쉬워해줄까? 아니면 그냥 덤덤하게 보내줄까? 축하를 해줄까?


혹시, 너한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을까? 또다시 멀어지는 것에 그저 그러려니 하면 어떡하지? 나만 신경이 쓰이는 관계이면 어쩌지? 오만가지 걱정 끝에 너에게 소심한 문자를 보냈다.


“빛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나 내년에 홍콩으로 유학가.”


그 문자를 보내고 황급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두려움에 직면하는 순간. 그 찰나를 견뎌내기엔 난 여전히 나약했다. 결국 또다시 도망쳤다. 절전된 핸드폰에 진동이 한두 차례 울리고 천천히 다시 메시지창을 열었다.


“장난 아니고 진짜??”


“응… 진짜로"


“왜? 꼭 가야 하는 거야?”

“안돼…”


아쉬움 가득한 말.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안타까워하는 널 보자 밀려오는 안도감, 고마움, 슬픔.


다행이다.

나 혼자만의 의미가 아니었구나, 일방적인 아쉬움이 아니었구나.

찰나의 안도감이 지나가니 고마움만 남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가 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네가 나를 불렀다.


“너네 집 앞이야. 잠깐 나와봐"


내려가자 네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에게 비친 가로등 빛이 주변의 눈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였다.


“이거 선물!!”


무언가 바리바리 싸 온 네가 물건들을 나에게 넘겼다.

편지와 손목보호대.

넌 그것들을 건네주며 선물 뭐 줄지 많이 고민했다고, 다른 친구에게 추천도 받아봤다고 그러니까 별로 마음에 안 들어도 받으라고.

벙쪄있는 나를 너는 꼭 안아주며 말했다.


“고마웠어, 너한테 정말 많은 걸 받았어. 가서도 꼭 연락하고 무슨 일 있으면 이 누나한테 언제든 전화해.”


친구에게 처음으로 받아보는 편지, 애정 어린 그 목소리에, 너의 진심이 가득 울려서 나는 연신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하며 너를 안아주었다.


3년 전만 해도 나보다 컸던 네가 이제는 내 품에 감싸져 들어와 안길 정도, 우리의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 넓은 마음으로 나를 안아주려 하는구나. 그 따뜻한 마음이, 향기가 되어 내 코를 간지럽힌 듯, 코 끝이 찡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너를 보내고 집에 와 열어본 너의 편지. 파란색 A4 용지를 빼곡히 채운 너의 손글씨가 보였다. 무슨 말을 적을까 많이 고민한 흔적, 우리의 첫 만남부터 지금의 우리까지의 이야기들. ABC를 하며 놀던 중학교 1학년, 내 친구와 연애하던 중학교 3학년의 너. 그리고 최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우리. 그 큰 이야기를 담담히 써 내려가다, 칸이 부족해 종이의 끝에 꼬깃꼬깃 눌러 담은 글씨. 한 자 한 자가 너무 소중한 선물이었다.




너를 떠나 홍콩으로 떠난 후에도 우린 꾸준히 연락하며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역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환경의 차이였을까. 연락의 빈도도, 내용도 점점 간소화되어 갔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때 즈음, 너를 생각하는 날보다 아닌 날들이 많아졌을 때 즈음, 난 나를 엄청 따르는 동생이 생겼다. 내적으로는 쾌활하고 올곧은 아이였지만, 남들과 어울리는데 마음의 벽이 있던 그 아이가,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자주 챙겨주게 되었다. 그 아이는 종종 내게 고민상담을 요청했고 난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해 곧잘 받아주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을 긋지만 나에게만큼은 마음을 열어주는 그 아이가 신기하여 하루는 내가 그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나를 믿어주냐고. 내가 정답이진 않지 않냐고. 그러자 그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빠는 날 엄청 잘 챙겨주고 내 말도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해줘! 그럴 때마다 너무 힘이 되고 고마워서! 정답은 어차피 없잖아, 그러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그 말을 듣자 예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 그때 내가 널 바라보던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너 역시 마냥 내가 너에게 이유 없이 잘해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난 너에게 잘해줄 수많은 합당한 이유가 넘쳐났는데.

넌 너도 모르게 내 빛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모르던 순간에, 이 아이의 빛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여러분, 누군가를 빛으로 여기고 그 빛을 동경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평생 따라갈 수 없을 거 같아 낙담하는 여러분. 이미 여러분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빛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지금까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빛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때 자신을 빛으로 여겨줄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게 여기지 말아 주세요.


누구든 살아가며 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듯, 누구든 언젠가 한 번쯤은 누군가의 빛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그 친구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내 빛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재주도 숫기도 없어 너에게 편지 한 장 못써 주었지만, 넌 그걸 알 자격이 있으니까. 늦게라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많은 빛이 들어있는 사람이라는 너의 이름의 뜻은 딱 너를 위한 이름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빛.jpg 항상 밝게 빛나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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