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와 전쟁에 관한 모더니즘적 답안, 버지니아 울프와 <댈러웨이 부인>
더없이 누추한 여인들, 남의 집 문간에 앉아 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마찬가지야.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에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 일을 배치하고는 한다. 본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나열해 보자면, 새벽 2시경 온 재난 문자에 잠을 설치고, 11시가 다 되어 일어나 간단하게 부리토를 하나 만들어 먹고, 운동한 후에 씻고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은 후 두어 시간 학교 공부를 하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과는 다르게, 우리의 생각도 이렇게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N 성향이 매우 강한 본인 머리에 이 순간 드는 생각을 타자 속도가 따라가는 한 빠르게 휘갈겨 보겠다. '의무병 지원 가산점을 위해서 자격증도 따야 하는데, 동사무소에 들러야 하는데, 아, 지금 마시는 녹차 라테가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노트북 타자는 왜 이런 식으로 배열되어 있을까, 타자를 너무 빠르게 치면 자판이 엉키던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과거에서부터 이어졌던 것이 선점자 효과 때문에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겠지, 왼쪽 코에서만 왜 콧물이 흐르지, 굉장히 비대칭적인데, 콧물이 점도가 낮으니 코로나인 것 아니야? 코로나 백신 임상 1/2상을 통과한 주식이 몇 배가 뛰었던데, 조금만 담아볼까?' 실제 우리의 생각과 논리적 서술 사이의 거리가 좀 체감되는가?
이렇듯 일반적인 서술은 우리의 행동을 표현하는 데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는 조금 부족한 구석이 있다. 현실을 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문학에서도 등장인물의 생각과 느낌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와 자연주의(naturalism) 소설이 인간 경험을 외적인 사건과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하려 했다면, 20세기 모더니즘(modernism)은 이러한 서사적 전통을 해체하고 내면의 주관적 경험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댈러웨이 부인>은 이러한 전환의 중심에 놓인 작품으로, 전통적 서사구조를 따르지 않고 인물들의 심리적 흐름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댈러웨이 부인> 속 다양한 문학적 기법과 효과
모더니즘 소설의 핵심적인 특징인 의식의 흐름 기법은 위에서 예를 든 본인 생각의 나열과 같이,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끊임없는 연상과 비논리적 전개 속에서 재현하는 기법이다. 울프는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인물의 의식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한다. 주인공인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거리를 걸으며 런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을 바라보고, 꽃을 만지는 순간순간은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그녀의 내면 상태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덕분에 소설은 클라리사가 파티를 열기 하루 전 아침부터 시작해 그녀가 파티를 여는 그 순간까지 단 하루 동안의 일만을 다루고 있는 데에도 분량이 꽤 된다. 이러한 문학적 기법과 후술할 주제 의식 덕분에 댈러웨이 부인은 단순한 심리 소설이 아니라, 모더니즘 문학의 정점에 위치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떻게 울프가 거대한 존재를 다루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내면과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섬세한 분석에, 더 나아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성공했는지를, 이번 글에서는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 시대적 배경과 문학적 표현 방식까지 포괄하여 찬찬히 살펴보자.
저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 바로 그 때문에 의회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거야. 사람들의 눈 속에, 경쾌한, 묵직한, 터벅대는 발걸음 속에, 아우성과 소란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지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샌드위치맨, 관악대, 손풍금 속에, 승리의 함성과 찌르릉 소리,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게 높은 여음 속에 들어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삶이, 런던이, 유월의 이 순간이.
소설은 삶의 아름다움을 경탄하는,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까지 한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변변치 못한 이웃의 불행을 사랑하는 일상의 아우성과 소란의 문법으로 다시 세운다. '그 사람들도 인생을 사랑하거든'은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인 동시에, 그녀가 허무 속에서 스스로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전쟁도 끝났다. 지나가듯 언급되는 이웃 귀부인들인 폭스크로프트 부인, 레이디 벡스버러의 부사(訃嗣)도 그녀에겐 그저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이 천진한 인물을 소설의 정중앙에 배치한다. 독자는 표면에서 심층으로 할 수 있는 한 깊이 들어가 등장인물의 심리 이곳저곳을 파헤치는 작가의 서술 방식 덕에, 퍽 사랑스럽고 낙천적인 중년의 댈러웨이 부인의 시각을 빌려 주변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은 3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택하나, 특정 인물들의 제한적 시각 위에서 주인공의 주관적 경험과 감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쉽게 말해, 주인공인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소설에서 '그녀'로 지칭되나 그녀의 입을 빌려서 그녀가 하는 생각, 그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순간의 느낌이 투명하게 서술된다. 외부 세계의 사건과 클라리사의 자유로운 생각은 분리되지 않고 병기되는데, 클라리사의 생각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자기의 내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그녀가 새로운 무언가를 관찰함에 따라서 새로운 생각이 꽃피고 관념의 뭉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시간은 흘렀지만, 피터의 손짓 하나에 과거가 되살아났다.
그런 클라리사의 회상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인물이 '피터 월시'이다. 부어턴에서 클라리사와 한때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던 피터는 '여행, 승마, 분쟁, 모험, 브리지 파티, 연애 사건들' 그리고 30년째 지니고 있는 오래된 뿔 손잡이가 달린 장난감 칼로 나타내어지는 인물이다. 더없이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경박한 피터 월시는 파티를 즐기며 사교 활동에 열을 다하는 클라리사의 가식적 속물주의-설득력을 더하는 그녀의 순진함과는 배치되는, 충동과 솔직함의 반대쪽 단면에 위치한다. 클라리사가 아침 런던의 유쾌한 공기에탄성하며 제일 먼저 연상하는 것도 피터 월시와 함께했던 부어턴 생활이고, 사색에 잠기면 언제나 도달하는 곳도 만약 그때 지금의 남편인 리처드가 아닌 피터 월시와 결혼했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이다. 그런데, 클라리사와 가치관을 이유로 다투고 결별한 그가, 인도로 향하는 배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빠르게 결혼을 선언해 모두의 일상에서 사라진 그가! -참 그다운 방식이다- 그 피터 월시가 십여 년 만에 내일 있을 파티로 분주해진 클라리사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 속의 서술자는 관찰자의 시점과 클라리사의 시점을 종횡무진 오가며 주변 사건과 그녀 내면의 과거 사건을 교차해 풀어놓는 동시에,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하면 그의 내면으로 잠깐 들어가 제한적 시점으로 그들의 생각을 묘사하기도 한다. 특히 두 인물이 오랜만에 만나는 장면에서 작가의 기교가 빛을 발하는데, 각자의 기억 속 상대방과 현실 속의 상대방이 달라졌기에 대화는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더라도 독자는 넷 이상의 주체가 밀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클라리사의 회상 속 피터 월시와 현실 속 그가 마침내 마주한 그 순간, 두 인물이 어떠한 생각을 했을지 소설의 본문을 같이 조금만 살펴보자.
「그동안 잘 지냈어요?」 피터 월시는 확연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그녀의 양손을 잡고, 양손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늙었군, 하고 그는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늙었으니 말이야. 나를 쳐다보는군, 그는 생각했다. 벌써 양손에 키스까지 했는데, 새삼스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손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그는 커다란 주머니칼을 꺼내 날을 반쯤 폈다. 여전해, 하고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묘한 표정도, 체크무늬 양복도 그대로야. 얼굴이 조금 비뚤어졌고, 어쩌면 좀 마르고 무뚝뚝해진 것도 같지만, 아주 근사해 보여. 전혀 변하지 않았어.「당신을 다시 보다니 꿈만 같아요!」 그녀는 탄성을 올렸다. 여전히 칼을 가지고 다니는구나. 정말 저 사람답다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만난 그 자리에서, 피터 월시는 자신이 다른 젊은 여자와, 그것도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녀와 새로 사랑에 빠져 이혼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도시에 들렀음을 고백한다. 현실이라는 땅 위에 발을 붙인 클라리사는 옥스퍼드에서 퇴학을 당하고, 인도로 가는 배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 인도 주둔군 소령의 아내와 재혼하려는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게다가 쉰이 다 된 나이에, 숙녀들 앞에서 아직도 젊은이들이 들고 다니는 주머니칼로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깎아대는 모습이란. 반면 피터는 한때 사랑했던, 어쩌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 그러나 손의 주름을 감출 수 없는 옛사랑 앞에 지금 서 있다. 억지로라도 떳떳하기 위해 클라리사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토록 멋지게 잘 사랑할 줄 안다고 선언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하다. 철없는 감정과 소년 시절의 명랑함을 육체의 노화에도 숨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옛 연인 앞에 클라리사는 이윽고 무력해진다. 그와 함께한다면 그의 명랑함을 마치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그녀는 떠나버릴 옛 연인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피터와 함께할 미래는 이미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 보는 것과 같으리라는 기분이 엄습한다. 연인의 가장 사랑하는 점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비극은 꽤 흔하다. 자신에게 없는 이 무절제한 자유분방함을 그녀는 동경하지만, 그녀의 삶을 구성해 온 수많은 현실주의적 사고가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버린 초라한 첫사랑에 이입하는 것을 막는다. 피터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빅벤의 종소리에 맞추어 문을 갑작스레 열고 들어온 클라리사의 어른이 다 된 딸 엘리자베스는 클라리사가 상상에서 돌아와 다시 무거운 땅에 발을 붙이게 한다.
그러나 한 번 흔들린 마음이 다시 완고하게 자리를 잡기는 어려운 법. 초대장을 보낼 사람을 숙고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현실 속에서 피터와 함께했을 미래를 생각하며 클라리사는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일상의 무의미를 와닿게 하는 인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클라리사는 권태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에 올라타 욕망 쪽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다, 해결될 수 없는 권태의 존재를 느끼며. 피터의 입장에서도 상념들이 가득 차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자신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녀의 현실적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우니. 피터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클라리사와 함께한 옛 시절을 반추하고, 행동을 후회하고 선택을 합리화하며 기억을 재구성한다.
상세한 서술을 통해 그려지는 복잡한 인물의 전형성
소설 속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결핍으로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재의 표상을 과거에 덧댄다. 과거는 다가오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클라리사 부인에게는 당장 다음 날 저녁에 있을 파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구성된다. 기억이 고정된 실체라는 오래된 믿음은 여기에서 타파된다. <댈러웨이 부인> 속 인물들은 현재 상황에 맞추어 과거의 자기 서사를 재해석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그 기억의 편린 속에서 어지러이 설킨다.
작가의 툭 튀어나온 낱알 하나까지도 포착하는 서술 방식은 신인상파 점묘화가 꾀하는 방식으로 등장인물을 조명한다. 무작위적 인상의 심리적 점층으로 인물은 특정한 단어를 통해 정의되기보다는 어떤 인상, 모호한 그림 여러 개가 겹친 일종의 형상으로 인식된다. 이 심리적 방식은 언어적 이미지의 베일을 여러 겹 덧대어 캐릭터를 가시화된다. 전형성의 평면도를 통해 독자는 말로는 온전히 형용할 수 없는, 마치 고딕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무수히 굴절하고 산란하는 빛과 같은 인물의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명사들에게 아부하나 그들의 신발을 닦는 지위에밖에 오르지 못한 휴 휘트브레드는 속물적인 영국식 허례허식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여러 인물의 시선을 통하여 그가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드러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태어나 사교계 인물들에게 중요한 상징인 레이디 브루턴의 이면에는 그녀에게 없는 내적인 성찰 능력을 감추기 위해 젊은 남녀를 캐나다로 이주시킨다는 허황된 계획이 있다. 그녀는 영혼의 허술함을 감추기 위해 가능성 없는 이 계획에 몰두하는데, 정작 고관들에게 보내는 여인의 온정 어린 계획이 담긴 편지를 대필하는 것은 휴 휘트브레드이다.
레이디 브루턴의 식사에 초대받지 못해 점심 내내 뾰로통해 있으면서도 가난한 사촌 앨리를 파티에 초대하기는 망설이는 댈러웨이 부인의 가식은 그녀를 더욱 솔직한 사람으로 만든다. 댈러웨이 부인은 늘 단벌의 코트만을 입는 딸의 가정 교사 미스 킬먼을 혐오하면서도, 미스 킬먼이 본인의 지식-노력과 땀-으로 구축해 낸 땅 위의 삶 앞에서 허무함을 느낀다. 반면 미스 킬먼은 파티를 준비하고, 누군가를 초대하고, 의미 없는 유행으로 기억될 순간-댈러웨이 본인조차도 회의를 느끼고는 하는-을 경멸하면서도 자기가 갖지 못한 여성적인 매력을 마음속으로는 부러워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아마 옷장으로 들어갈 새 외투를 사기도 한다. 이 두 인물의 대칭적 제시는, 단순히 가진 것이라고는 예법과 사교계 식 유행밖에는 없는 유한계급 여성과 무형적 재산에 자부심을 느끼나 교양과는 거리가 먼 근대 신여성의 충돌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부어턴에서 살던 어린 시절, 클라리사는 어느 향사와의 아이를 가져 그와 결혼한 하녀 출신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오만과 새침으로 반응한다. 하녀 출신 여자의 경우와 같이, 던져지는 삶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곱게 자란 클라리사를 피터는 단호하게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로 규정했다. 그 시절부터 이어져 왔던 그녀가 지닌 순진무구함의 양면성은, 피터 월시, 그리고 미스 킬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의 위기로 발현되는 것이다. 작중 인물들은 다른 누구를 단편적으로 판단하지만 내적으로는 양면적인 고민을 겪는다. 돌아온 피터가 기억 속에서 헤메게 두는 댈러웨이의 심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희망과 대의에 부풀어 피터와 한때 세상의 개혁을 논하던 소녀의 모습 중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 그녀에게 원래부터 있었다고 시간이 지나 밝혀진 것은 아직도 순백색으로 느껴지는 침대보뿐이다.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삶의 의미에 있어 용렬한 실패자로 남은 그들 신세가 겹쳐 보였던 것이 아닐까. 그녀의 연민은 아마 피터 월시가 아닌 스스로를 향했을 것이다. 또한 클라리사의 파티에 모인 모두를 영국식 속물주의로 판단하려 하는 피터 월시야말로 가장 영혼의 죽음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과 클라리사 각자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 통찰하지만,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도망간다. 인생에서도, 사랑에서도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영혼의 죽음을 지껄이나 길거리의 여자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눈요기를 채운다.
그렇게 이 모든 삶의 절단면을 종합했을 때 결국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복잡함을 포합하는 전형성이라고 답하고 싶다. 종교에서 구원을 찾는 미스 킬먼, 파티에서 지루함을 쫓는 댈러웨이 부인 모두의 안에서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쫓다 생긴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꽃핀다. 이들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부조리를 타파할 생산적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퍽 사랑스럽고 이해되는 전형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대립 속에서 현재를 바꾸려는 인물들이 아닌, 존재의 불화를 통해 의미를 발산하는 인물들의 삶을 제시함으로 실존의 물음에 답한다.
존재의 지속과 베르그송적 관점에서 본 댈러웨이 부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간의 본질을 단순한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연속적으로 축적되는 ‘지속(durée)’으로 설명했다. 그는 인간 경험이 단절된 순간들의 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연속적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클라리사가 런던 거리를 걸으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순간이 겹치고, 그녀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의 피터 월시와의 추억, 젊은 시절의 선택, 그리고 현재의 삶이 한순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방식은, 베르그송이 말한 ‘의식 속에서 지속되는 주관적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다.
클라리사의 하루는 객관적 시간으로 보면 단순한 일상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안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형성하며 흘러간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감각과 감정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베르그송적 관점에서 보면, 클라리사는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클라리사는 젊은 시절 피터를 사랑했지만,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녀를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 속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삶을 단순히 후회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새기며, 과거의 선택이 어떻게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왔는지를 받아들인다.
존재의 위기 속 삶의 의미를 탐색하며 클라리사는 현재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파티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행위조차도 그녀에게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울프는 클라리사의 파티가 단순한 사교 행사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을 타인과 연결하며 삶을 긍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녀는 세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도, 특별한 업적을 남기는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는 베르그송이 강조한 순간 속에서 지속을 경험하는 삶과도 연결된다.
이와 대비되는 인물이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이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실과 단절된 그는, 지속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고통 속에 갇혀 있다. 그는 더 이상 삶과 연결될 수 없다고 느끼며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셉티머스의 죽음은 클라리사에게 하나의 계시로 작용한다. 셉티머스는 삶을 거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은 클라리사에게 삶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그는 삶을 거부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했고, 클라리사는 그의 부재 속에서 더욱 존재의 의미를 되새긴다.
결국, 클라리사는 삶의 의미를 거창한 목적에서 찾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순간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꽃, 대화, 파티, 사람들과의 교류—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을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받아들이면서, 지속하는 삶 순간순간에 깃든 순간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사교계 인물들의 허례허식을 비판하나 런던의 건물을 보고는 어느새 경박하게 인간의 승리를 지껄이는 피터 월시가 파티에서 다른 인물들과 클라리사의 험담을 하다 옆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대목에서 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그 존재의 순간이야말로 찬란한 삶의 어리석은 황홀함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이렇게 시간을 통해 인간 존재를 탐색하는 소설이며, 결국 그 시간의 흐름이 있기에 부각되는 순간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이야기로 완성된다. 실존의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작가 울프는 어설픈 본질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는 실존한다는 뚜렷한 답을 내놓는다. 삶이란 결국 순간의 조각들로 엮인 모자이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