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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정 Jun 25. 2024

한낮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한낮 산책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발끝에 진한 먹을 묻혀서 곧게 세우고 일필휘지(一筆揮之) 강둑을 친다. 청잣빛 하늘을 눈빛으로 묻혀와 물길을 엷게 채색한다. 그 위로 삶은 계란흰자 같은 구름 한점 떼다 잘게 으깨어 바른다. 강바닥에서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를 부르면 너울을 만들며 그림 속으로 파고든다. 강둑에 듬성듬성 억새풀도 찍어 두었다. 숨도 쉬지 않고 헐레벌떡 달려온 바람이 그림 속을 몰아쳐 달려도 흔들리는 것은 억새풀의 마음일 뿐 그림은 요지부동 그대로다. 내 마음속 그림이니 무엇으로 채우든 자유롭다.


  강변을 걷는 것은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그리는 것이다. 먹물을 가져다 굵게 찍어 바른 것 같은 둑길하며 적절히 배합된 농담으로 엷게 채색된 강물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한다. 한걸음 발 바꿈을 할때마다 오래된 영사기속 사진이 바뀌는 것처럼 강변의 풍광이 내 눈빛 속에서 여러 장으로 도는 그림같다.


 맑은 물이 흐르듯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혼탁했던 마음이 맑아진다. 지혜로운 이의 눈빛 같은 자연의 순수함도 느낄 수가 있다. 어머니가 둘러 쓴 하얀 머릿수건 같은 백지 위에다 농담 옅은 유채색의 그림들을 그려 넣을 때면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뭔가를 채워 넣고 싶은 열망에 빠진다. 그 열망은 내가 세상을 향해 다가 설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강가에는 한 폭의 하훼화가 한창이다. 목화솜을 흩어놓은 것 같은 흰 꽃과 하트모양의 잎을 달고 있는 토끼풀이 바람에 춤을 춘다. 그 모양이 입을 모아 합창 대회라도 여는 것 같다. 들썩임이 요란하지 않고 가볍다. 냇가를 주름잡던 갈잎 떨기나무 갯버들은 하얀 솜사탕을 실처럼 갈기 찢어 놓은 듯 하고 떼어내면 폴폴 강으로 날다가 푸른 강에 빠져서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다. 이제 곧 날아 오를 준비로 부풀어오른 한 마리의 애벌레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숨죽이고 있는 강이다.     

 강변을 걷다보면 꽃잎 사이로 숨었다 사라지는 나비처럼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햇살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배경속에서 새로운 그림속에 나를 맡기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에 있다가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열망도 생긴다. 현실에서 일탈을 꿈꾸기에 혼자 걷는 강만큼 운치 있는 곳도 없다. 그러나 강은 변화를 꿈꾸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잔잔하던 강에 물고기 한 마리가 공중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어느새 강 줄기에 크고작은 물고기떼가 나타났다. 그와 함께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려는 사람들이 단내 나는 설탕에 개미 모여들듯 모이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풍경이 시끌벅적 사람들이 몰리면서 강 풍경이 떠들썩한 풍속화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이 강물속에서 살아 숨쉬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처럼 활기가 느껴졌다. 숨고 싶던 마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하얗게 눈부시다. 또 다른 수묵담채화를 그려야 할 것만 같다. 짙게 내려앉은 거인의 거대한 몸집처럼 강 위를 누르고 있는 산 그림자의 농도는 짙은 청록색이다. 그 옆을 하얀솜 같은 부드러운 구름이 산 그림자 곁을 서성인다. 잠시 놀던 물고기는 정적 속으로 숨어버리고, 또 다른 고요가 그림의 느낌을 살린다. 


 마음을 바로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강가를 벗어났다. 강물도 끝없이 흐르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아득히 멀다. 삶의 무게도 그것이 무겁다고 말하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지듯이 삶에 대한 열망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내면 그 열망이 고스란히 승화되어 돌아온다. 그림을 그리느라 풀었던 도구를 내안에 살뜰히 모아두고 홀가분하게 강을 떠났다. 


 각다분한 삶을 사는 사람은 강가를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색 없이 걷는 걸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 풀 한포기 구름 한 점 헛되이 보지 말고 한 폭의 수묵담채화에 담아야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삶에 대한 열정이 생기고 지친 마음에도 온기가 생긴다. 강은 그 진리를 알고 언제든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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