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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Apr 24. 2020

무엇도 쓸 수 없는 사람

흔들리고 아프고 주저앉았다가 울고

바람이 불었다. 온통 흔들렸다. 바람이 흔드는 것인지 내가 흔드는 것인지, 무엇도 모른 채로 온통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며 살았다.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매일이 어떻게 지나는 줄도 몰랐고, 관심도 둘 수 없을 정도로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쓰고 있으면, 마치 고난의 퀘스트를 마치고 난 후의 경험담을 써야 할 것 같다. 허나 나는 어떤 성공담도 갖질 못했고, 교훈을 얻을 실패담 또한 없다. 내 시간은 그저 힘들었고, 힘들었다. 힘들고 난 후에 나는 더 성장했으며, 나의 삶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거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건 거짓이니까. 나는 삶을 더욱 부정하고 있으며, 물론 누구도 더 쉽게 사랑하거나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결국 무엇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더욱이 내 삶은 포기하기가 여간 어렵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속에 포함된 관계들을 정리하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는 것.


살면서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나에게는 미루는 일, 버티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 되어 있었다. 배려와 이해라는 말로 내가 포기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며 나를 달랬다. 결국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매일 죽이며 살아온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내게 좋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늘 미뤄두었다. 나는 포기가 빠른 것이 아니라 포기를 일삼아 살아온 사람이었다.


난 우는 방법을 모를 때

참는 법을 먼저 배웠어

소중한 건 지켜내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게 더 편해

난 세는 방법을 몰라서

얻은 것만으로 기뻤고

꿈이란 건 이루는 게 아니라

미루는 것인 줄만 알았어


9와 숫자들, 실버 라인


어떤 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나를 대신해 울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울리고, 나를 가장 아프게 한다는 것. 가장 소중한 것일수록 가장 큰 상처를 낸다는 것을 깊이 새겼다. 새길수록 덧나고 아팠다. 새살이 돋기도 전에 다시 상처가 났다. 힘들어서 울다가 지치면 화가 났다. 내가 가진 모든 것에 화가 났고, 내게서 멀어진 것에 화가 났다.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의 모자람에 나는 점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모양을 하고 있는 나를 감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쓰라렸다.


결국 또 투정이다. 아픔을 통해 성숙할 수 있는 인간이면 좋겠지만 글렀다. 아무리 아프고 시간이 지나도 성숙이라는 단어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그래서 시작했다. 아픔과 시련을 거름 삼아 성장할 수 없는 나라면, 나와 내게 온 모든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라도 키우고 싶었다. 나를 좀 세우고 싶었다. 똑바로 설 수는 없어도 얕게라도 뿌리내리고 버틸 힘이라도 얻고 싶었다.


나를 키우겠다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일기였다. 일기라면 지긋지긋하고, 늘 미루던 내가 1년을 기록하기로 했다. 매주, 한 편의 일기를 썼다.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혹은 무엇도 적지 못했다. 그래도 꼬박 1년을 적었다. 단어를 나열하거나, 문장이 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루는 무엇도 쓸 수 없는 사람이었고, 하루는 너무 많은 것을 쓰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감정과 생각을 풀어놓을수록 나는 가벼워졌다가 그 빈자리를 다시 울음으로 채웠다. 그리고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일기를 쓰면서 알았다.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 포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때로는 포기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온갖 빈곤을 가졌지만 그것에 만족한다는 허상을 품고 살았다. 그나마 가진 것을 행여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까치발로 매일을 걸었다. 나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속이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내가 쓴 일기 속 나는 거짓말 장이에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멍청이였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스스로 바라는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나는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 고백을 위해 쓴 일기는 푸념과 후회, 원망과 울음으로 채워졌다. 다시 읽어도 내게 읽히는 것은 온통 엉망진창인 나였다. 아무리 좋은 것을 내보이려 해도 가진 게 없었다. 그래도 썼다. 그렇게라도 바닥을 드러내야 뭐라도 채워지지 싶었다. 비워낸 구멍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우선은 쏟아내야 했다. 그게 우선이었다. 쏟아내지 못하면 내가 질식할 것 마냥 갑갑했다. 여전히 무너지고 꺼내 놓을 거라고는 온갖 투정과 울음뿐이지만.


1년을 쓰고, 지금은 해를 넘겨 벌써 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엉망진창이고, 수시로 고꾸라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이제는 누가 손잡아 주지 않아도 혼자 일어난다. 지금도 자기 고백밖에 쓸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더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던 겁쟁이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시작한 캠페인은 언제쯤 마무리될 수 있을까. 이제 막 주사위를 던진 기분이다. 나는 상처 입어 죽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한낱 인간이라 회복도 느리고 능력치도 쉽게 얻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아파도 포기가 어렵다는 것은 알았고 또 포기를 일삼았지만, 우선은 이 계절 동안은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일단, 오늘은 나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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