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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04. 2020

이제 뭐 하지?

잘했어, 하나라두

오래 했던 일을 그만두었다. 10년 가까이했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준비도 없이 그저 흘러가듯 시작했다. 나름 열심히 했다. 배우고, 익히며. 잘하고 싶었다. 나는 잘하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쥐어짜듯이 남은 마지막 해를 보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해를 넘겼다. 마지막 업무를 마치고, 함께 오래 일했던 동료는 나의 매일이 위태로 보였다 했다. 나는 그렇게 위태로웠다. 어떤 날들은 말로도, 글로도 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나를 몰아세웠다. 매일이 마지막인데 그 끝을 밀면서 앞으로 갔다.


그만두기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멈추고 돌아보니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보낸 시간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소란 속에 보냈던 날들에 너무 많은 이름들이 있다.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이름과 얼굴들. 그렇게 열심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바라보니 그저 아득하다. 그 모든 시간 속의 내가 어색해졌다. 오늘의 나도 낯설다.


일을 그만두고 짐을 정리했다. 자리에 남은 짐들이 많지 않다. 내가 하던 일은 물건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것을 주는 일. 서로가 주고받는 일. 업무의 주 대상은 5-7살 아이들이었다. 책상 앞에는 아이들이 준 편지와 작은 액세서리, 색종이로 곱게 접은 꽃과 열심히 그린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벽을 빼곡히 채웠던 것들을 종이봉투 하나에 다 담았다. 그 큰 마음들을 봉투 하나에 담을 수 있다니. 휑한 벽면을 보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 10여 년의 시간이 봉투에 담긴 것 같았다. 컴퓨터에도 서류철에도 남길 게 없었다. 아이들이 내 노력과 시간을 증명해 줄 수 있지만 다들 해를 보내고 떠나갔다. 늘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일이었다. 마지막 날은 늘 눈물을 많이 흘렸다. 떠나는 아이들은 웃지만 남겨진 나는 울었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면 또 활짝 웃었다.


출근을 해서 퇴근할 때까지 내가 있던 곳에는 온갖 소리들이 맴돌았다. 그곳에서 세상 누구보다 친절한 사람으로 살았다. 엄마에게 짜증만 부리던 딸은 세상 착한 어른의 모습이 되었다. 어떤 날은 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이런 목소리로 말할 수 있구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나에게 놀라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어떤 모습이 내 모습일까. 내가 가진 많은 모습 중에 어떤 모습이 정말 나인지, 이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인지. 같은 일을 오래 하면서도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늘 의문이 들었다. 재밌게 일을 하다가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관성으로 사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다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 일이 나에게 맞다는 것,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차안대를 쓰고, 달리는 데에만 열중했다. 옆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렸다. 물론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채찍질만 해댔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혹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닐까 겁이 났다.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증명하는데 힘쓴다고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더 많은 거짓을 만들도록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니까. 더 쉽게 내 눈과 귀를 가리니까.


드디어 증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나를 위해 멈췄다. '잘' 하기 위해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살기로 결정했다. 물론 내 삶의 모든 부분을 다 바꾸지는 못했다. 오늘도 삶의 다른 부분들은 애쓰며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일은 그만두었다.


며칠 전, 동생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동생이 듣는 노래들이 흘렀다.



아마두

택배가 도착할걸 아마두

여친이 생길 거야 아마두

민수도 잘될 거야 아마두

동갑인 차 살 거야 아마두

팔로는 애 낳을 거야 아마두

머리가 자랄 거야 상구두

기석인 모르겠어 하나두


아마두 / 염따, 딥플로우, 팔로알토 (Paloalto), The Quiett, 사이먼 도미닉




아마두 잘될 거야. 아마두.

그런데 모르겠어, 하나두.

그래도 잘될 거야, 아마두.

하나두 모르겠어. 그래두 그만뒀어.

잘했어, 하나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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