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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Apr 19. 2020

우리 모두 눈꺼풀 뒤에 우울이 숨어있어

내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 있다. 나보다 많은 날을 살았고, 나와 많이 다르지만 또 같은. 어릴 때에는 많이 읽고, 배운 이들이 똑똑하며 지혜롭고 현명하다 여겼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다. 내 친구들은 많이 읽지만 많은 책을 읽지는 않는다.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똑똑하지만 많이 배워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들에게 듣는 많은 것이 내게 차곡차곡 쌓였으면 좋겠다.


하루는 친구와 동네를 산책했다. 해가 졌지만 바람은 여전히 더웠다. 걸으면 땀이 살짝 맺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그의 또 다른 친구 이야기를 했다. 자기보다 더 나이가 든 친구. 여럿이 모여 의미 없지만 모든 것이 의미 있는 말들을 나누었을 거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힘든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고. 나누었던 말들 사이로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눈꺼풀 뒤에 우울이 숨어있어.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


내 친구는 그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나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말이 머리와 가슴을 내리쳤다. 내 눈꺼풀 뒤에 숨어있을 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면 우울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매일이 그랬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우울이 슬픔이, 눈물이 나를 찾았다. 또다시 눈을 깜빡이면 괜찮아졌다. 우울은 수시로 나를 찾았다. 나는 매일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걷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걷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속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가기도 했다는 것. 우울은 눈꺼풀을 깜빡일 때 찾아오기도 했지만 또다시 그 속으로 숨기도 했다. 매일을 힘들어하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며 괜찮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자신은 여전히 힘든 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그래도 친구는 조금은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 같아 보였다.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자신을 몇 발자국 뒤로 나와서 바라볼 수 있는. 힘든 것은 여전히 힘들고, 아마 평생 지울 수는 없을 테지만 그것을 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생긴 것 같다.


누군가는 말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다.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는 일은 없었다. 잊혔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불쑥불쑥 떠올라 다시 나를 힘들게 했다. 친구는 말했다. 아마 계속 떠오르고 힘들 거라고.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리고 친구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다면, 그런 순간이 있으면 된다고.


정말 그래요. 눈꺼풀 뒤에 숨어있어요.
수시로 나오지만 또 숨어요.
매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순간도 있어요.


너무 힘든 날은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내가 읽었던 어떤 책 보다 내게 힘이 되는 말들이 있다. 그들이 살면서 배우고 적어둔 것들을 모아 우울과 함께 눈꺼풀 뒤에 쌓아둔다. 숨어있던 우울이 나를 찾아오면 내 친구들의 말을 함께 꺼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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