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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an 06. 2021

20% 속도 감속, 비상등 켜기

누가 스노우 볼을 뒤집은 듯, 하얀 안개가 펼쳐졌다. 분명 조금까지도 깜깜한 밤이었다. 사방이 어두워 내 차의 라이트가 비추는 거리만큼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깜빡이를 켜고 내 앞으로 차선을 변경해 달리던 앞 차의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하얀 밤에는 라이트가 비추는 거리보다 세상이 더 좁아지고, 아득해졌다.


20% 속도 감속

비상등 켜기


고속도로를 달리며 머리 위로 스쳤던 문구가 떠올랐다. 비상등 버튼을 누르면서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내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분명 스피커로 노래가 흐르고 있었는데, 안개를 뚫고 달렸던 그 시간 동안은 모든 것이 멈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운전을 하고 처음 맞는 상황에 조금 당황했다. 아주 깊은 어둠은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밝은 어둠은 예상하지 못했다. 누군가 내가 달리는 도로를 손에 쥐고 뒤집어 놓았다. 어린 내가 스노우 볼을 뒤집고, 흩날리는 하얀 눈이 다 가라앉기를 기다렸던 때는 아주 고요하고, 신비로운 기분에 가까웠다. 그런데 운전하며 마주한 이 순간은 적막하고, 불안했다.


까만 밤에 내린 하얀 안갯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하얗고 까만 도로 위, 서로의 빛에 의지해 뚫고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 깜빡이는 등이 너무도 고마웠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또 긴 시간을 지나 안개가 걷혔고, 비상등 버튼을 눌렀다. 앞에 달리던 차들은 벌써 더 멀리 갔는지 차량의 후미 등이 보이지 않았다. 겨우 내 차의 라이트가 비추는 도로까지만 시야에 들어왔다. 양 옆으로 난 줄을 벗어나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그렇게 3시간 가까지 운전을 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하고 나니 정말 이곳이 내가 오고 싶었던 곳인지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여전히 안갯속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 같던 그 고속도로 위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비상등을 켜고 달리고 있지만 내 앞으로도 뒤로도 어디에서도 깜빡이는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등을 끄지 않고, 지금 이 속도로 계속 달려야겠다. 누군가 나를 위해 켜 둔 비상등을 마주할 때까지. 얼마나 더 달려야 내가 가려고 한 곳에 다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안개가 걷히면 보이는 것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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