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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n 02. 2022

나는 느리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울긋불긋 화려한 색상으로 된 것과 아이보리 색상에 끝자락이 레이스로 된 양산 중에서.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주 조심스레 둘 다 내 가방에 넣었다. 누구도 모르게.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늘 조용히 내게 주셨다. 누구도 모르게. 그것이 할머니가 내게 주는 마음이었다. 가족이 되고는 늘 그렇게 마음을 주셨다. 나는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홀로 살아온 시간, 힘들게 지나온 날들의 기억을 찬찬히 들었다.


밤이 지나기 전에 서울에서 출발했다. 날이 밝았을 때 도착했었나. 언제였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그냥 내가 잘 도착했다는 것만 선명하다. 할머니가 멀리 가시는 길에 배웅할 수 있었다. 너무 약해져서 더는 버틸 힘이 남지 않은 할머니는 혼자 먼 길을 가셨다. 염을 하고, 차가운 할머니 손을 잡았다. 고작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훔치는 게 고작이었다.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이 그저 아팠다. 이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 더 아팠다. 이별은 늘 빠르고, 나는 늘 느리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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