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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02. 2020

비겁해도 괜찮아

2020 여전히 쉽지 않다

‘입 놀릴 시간에 몸 놀리면 언제든 끝나게 되어 있어’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일본 만화에서 영화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다시 영화로 만들었던.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이 던지는 대화가 부끄러울 정도로 인위적으로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자꾸만 나를 찔렀다.


주인공 친구가 주인공에게 말했다. 열심히 힘들게만 움직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뼈아픈 말, 하지만 어쩌면 어느 순간에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왜 힘들게 움직이고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게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까?


영화에서 밤 사이 분 거센 비바람은 열심히 힘들게 살아온 매일의 수고를 쓰러뜨렸다. 벼들이 밭 가까이 누웠다. 주인공은 쓰러진 벼들을 다시 세워 묶는다. 고되게 일하며 힘들다 말하는 그에게 함께 일하던 고모는 말했다. 입 놀릴 시간에 몸 놀리면 언제든 끝난다고. 그 한 마디에 지난 몇 달간의 내 생활이 스쳤다.


고민을 미루고, 결정을 미루고 열심히 움직이기만 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빙 돌아서 언덕을 넘었다가 어떤 날은 주저앉아 울고, 또 한동안은 무엇도 하지 않는 날을 보내고. 다시 일어나 밥을 차려 나를 먹이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보면 또 내일이 오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도 끝이 나고,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끝도 어느 결에 곁에 와 있었다. 내가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없는 일상이 늘 있고, 그 자리에서 늘 고민을 조금씩 풀어가고.


주인공은 바닥으로 누운 벼를 세워 묶으면서 허리를 숙이고 다시 세우며 몇 번을 주저앉고 싶었을지 모른다. 몇 번을 그 밭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불평 사이로 고모의 말을 들으며 숙였던 허리를 세웠을 때, 그는 자신이 세운 벼들을 보았다. 그리고 끝자락에 와 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벼는 쓰러지기 전처럼 온전히는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기대며, 그들을 단단히 묶어둔 벼 줄기에 의지해 서 있다. 주인공도 나도 그렇게 매일의 노력과 수고에 기대고 의지하며 조금씩 문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고민해 온 것은 아닐까. 내가 살아낸 나의 하루는 나를 문제로부터 도망치게 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누구나 고민의 순간, 결정의 순간, 많은 문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미루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순간에도 우리는 노력하고, 결정하고, 해결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앞에 놓일 문제를 마주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서 있을지 결정하는 힘은 내 일상에 있다. 분명 지금 나의 일상이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벼 줄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비겁해져도 된다. 힘들 때 문제를 잊은 것 마냥 열심히 하루를 살면서 조금씩 비겁해 지자. 비겁해도 괜찮아.


 2018.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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