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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05. 2020

엄두가 나지 않을

여전히 멀고,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엄마의 아욱, 시금치. 내 엄마는 올 해로 환갑이 되셨다. 그는 60년대 시골에서 태어났고, 막내딸로 살았다. 그녀의 큰 언니는 나의 엄마가 태어났을 때, 큰 딸을 낳았다. 그들의 터울만큼이나 먼 기억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들의 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생 때 병상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말수가 적으셨고, 마른 몸에 키가 좀 크셨던 것 같다. 다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의 아버지,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상을 치르던 가족들의 소리였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셨던 할아버지의 장례는 엄마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골집에서 치러졌다. 동네 사람들이 다 집으로 왔다. 시골집에는 사랑채가 따로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그 사랑채에서 잤다. 좁고, 온갖 짐들이 들어차 있던 곳. 불을 켜도 밝지 않은 방. 어른들은 큰 채에 모여 손님들을 맞거나 울거나 했다. 나는 그 작은 방에 누워있었다. 방도, 밖도 어둠만 가득했다. 그 밤 사이로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아이고' 여느 장례식이 그렇듯 소리로만 울었다. 누운 자리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슬픔도 죽음도 어린 내게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여전히 어둑한 방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이었다.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지만 무엇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아마, 내 엄마였을 거다. 어린 딸 옆에 누워서 혼자 조용히 우는 할아버지의 다 큰 딸.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는 갓 서른을 넘겼다. 할아버지의 막내딸은 처음으로 부모의 상을 치렀다. 날이 밝았고, 그는 다시 일어나 언니, 오빠들과 마주 앉아 손님을 맞았다. 나는 여전히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종종 들려주시던 외할아버지는 늘 엄하셨고, 막내딸에게도 그리 살갑지 않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늘 할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놀러 나갔고,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대신해서 할아버지께 거짓말을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엄마가 할아버지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그렸다. 어린 나는 방학 때도 아침 일찍 씻기려는, 쓴 한약을 먹이려는 엄마를 피해 마당을 달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무서운 일이다. 내 엄마를 잃는 것. 나의 가족을 잃는 것. 겨우 서른을 넘겼던 엄마는 어린 딸 옆에 누워서 조용히 울었다. 어린 나는 엄마가 사라질까 많이 울었다. 내가 떼를 쓰면, 내가 많이 울면 힘든 그가 떠날까 봐 혼자서 울었다. 그러면서도 늘 퉁명스럽고, 살갑지 않은 딸이었다. 말 한마디 곱게 할 줄 모르는 무뚝뚝한 딸. 무서운만큼 거리를 두었다. 잃을까, 다정하고 그리운 것이 생길까.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그렇게나 무서운 일이다. 모든 것이 겁나고 아프고,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차오르는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두렵다. 내게 소중하고 가까운 것, 사람들이 삶에서 사라질 순간이.


엄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기일이 가까워지면 이모들과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을 찾아가신다. 아마 가시는 길과 돌아오시는 길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 나에게 할머니 기일 즈음 연락을 하시면 수화기 너머로 울음을 삼키시는 것이 전해진다. 그도 나처럼 하루가 힘들다고 느껴지면 엄마가 떠오르는 것 같다. 나를 입히고 먹이는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날에 엄마와 아빠를 그렸을까.


그는 여전히 나를 먹이려고 아욱과 시금치를 다듬고 깨끗이 씻는다. 나는 아직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오늘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엄마,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준 아욱으로 국 끓여 먹을게. 잘 챙겨 먹을 테니까, 걱정 마요. 고마워, 엄마.'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내 곁에 있다. 그리고 나도 조금 더 다정한 얼굴로 기억되고 싶다. 누군가는 힘들 때, 나의 다정함을 그리워하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소중한 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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