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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Apr 30. 2020

다르고 변하고 더해지고 지나오며 내가 되는 것들

차를 잘 마시지 않는다. 가끔 차를 마실 때에는 너무 오래 우려 끝에는 쓴 맛을 봐야 할 때가 많았다. 컵에 따라 둔 뜨거운 물이 시간이 지나 차갑게 식었다. 제때 마시지 못한 차는 따뜻하지도, 제 맛을 내지도 못했다.


이십 대 초반에 내가 알던 두 사람의 마음도 그랬다. 전해야 할 때 꺼내지 못한 마음은 끌어안고 보낸 시간 동안 차가워졌고, 본연의 맛을 낼 기회도 잃었다. 서로의 오랜 마음을 알고 함께 했지만 두 사람이 나누어 마신 차는 너무 썼다. 그때의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노트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오래 우려낸 차와 사람의 마음은 쓰다.’라고. 내어주어야 할 때 꺼내지 못한 것들이 변하고, 시간이 지나 바래는 것이 서글펐다.


기억 속 두 사람은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때 내가 적어 둔 말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차는 드물게도 마시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는 이가 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원두를 곱게 갈아 필터에 넣고, 물을 뜨겁게 끓여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친구가 커피를 내려주면 식기 전에, 향과 맛이 달아나고 달라지기 전에 빠르게 마시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커피를 주문하기 전, 친구에게 물었다.

 

“식어도, 시간이 지나도 좋은 커피가 있나요.?”

“있어요. 에티오피아요. 시간이 지나 식으면 더 깊은 맛이 나요.”


친구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나도 지체 없이 주문했다. 친구가 내려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시간을 보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난 기억들을 되새겨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식어버린 커피를 다시 마셨다. 천천히 바닥이 다 보일 때까지. 쓴 맛도 신 맛도, 고소함도 진하게 느껴졌다. 그 날에는 노트에 ‘시간이 지나도 더 깊어지는 것이 있네요.’라고 적었다.


요즘은 커피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시게 됐다. 처음의 부드러움과 따뜻함도 그리고 천천히 식어가는 온도와 달라지는 맛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가끔은 차를 마시기도 한다. 쓴 맛도 몇 번을 우려서 연해지는 맛도, 시간이 더해지며 변하는 맛도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여전히 변하고 바래는 것들은 아쉽고 서글프다.


해가 더해지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맛, 내가 감당해야 하는 마음들도 계속 더해졌다. 힘들게 2019년의 봄을 지나는 내게 엄마가 문득 말씀하셨다. 어릴 때에는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게 되거나, 맛있게 먹던 음식을 지금은 먹지 않게 된 것처럼 그냥 달라지는 거라고. 내 식성처럼 마음도 삶도 조금씩 변하는 거라고. 아쉽고 서글퍼도 결국엔 많은 것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다 내 맘 같지는 않고 또 내 맘도 늘 같지는 않으니, 같은 자리에 있다고 같은 것은 아니었다. 차의 맛이 달라지고, 식으며 진해지는 커피처럼. 처음과는 달라지는 많은 것들. 내 맘에 담아둔 것들도 조금씩 변한다. 나는 같은 자리에 있지만 어제와 그리고 그때와 다르다. 허나 나는 여전히 나이기도 하다. 나와 내 주변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나는 여기에 있다. 나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슬프고 아쉽다. 해가 바뀌었지만 노트에는 무엇도 적지 못했다. 과연 적을 말을 찾았을까. 찾을 수 있을까.


많은 것이 변하고 달라진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좀 더 머물렀으면 한다. 달라지고 변해도 내가 더욱 나처럼 살게 되기를 바란다. 계절을 보내고 해가 변해도 나의 매일매일의 차이로 내가 나일 수 있기를. 변하고 빛이 바래도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기를. 여전히 차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며 노트에 적을 말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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