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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Apr 28. 2020

나의 수모

사진으로 남지 않아 다행이다

나 어릴 때에는 꽃 달린 수영모가 있었다. 양쪽에 턱 아래로 묶는 끈이 달린 선명한 분홍이나 노랑의 수모.


어린이로 살던 동네에서 차를 타고 가면 ‘서대산’이 있다. 그리고 산 아래에는 큰 수영장과 놀이기구가 있어 놀이공원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동네 친한 가족들과 함께 종종 그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야외 수영장이 있는데, 어린이가 일어서도 무릎까지만 물이 차는 풀과 어른들의 머리만 동동 떠 있는 깊은 풀. 그리고 무지개색의 미끄럼틀도 있었다. 내 기억 속 야외 수영장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여름에 가면 사람들이 가득했다.


놀이공원에는 하늘 위로 빙빙 도는 회전 그네도 있었다. 내가 그 그네를 탔는지 기억이 정확치 않지만 하늘 위를 날았던 것도 같다. 작은 회전목마와 어린이를 위한 롤러코스터 정도가 기억에 있다.


갓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나. 아니면 좀 더 어렸을까. 서대산에 있는 수영장에 갔다. 엄마는 나에게 큼지막한 꽃이 달린 수모를 주셨다. 노랑인지 꽃분홍인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내 수모에 꽃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입었던 수영복은 빨갛거나 파랗거나 아무튼 너무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꽃 달린 수모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수모를 쓰지 않고는 수영장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수영장에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가진 것들이 싫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다들 나보다 예쁜 수영복, 깔끔한 수모를 쓰고 있었다. 꽃도 달리지 않은. 내 눈에 세련돼 보이는 수모를 쓴 아이들. 더구나 남자아이들은 수모를 쓰지도 않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나는 긴 머리를 묶어서 수모에 넣고, 물속에 들어갔다. 이 화려한 꽃 모자는 물속에 들어가면 물을 가득 담았다가 머리를 밖으로 내밀면 담았던 물을 그대로 쏟아낸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모자. 끈도 길어서 턱 아래로 달랑달랑.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미끄럼틀이라도 타면 꽃모자는 이마 위로 올라간다. 머리에 낙하산을 달고 있는 것 마냥. 그리고 소재도 부드럽지 않아, 수세미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처럼 까슬까슬하다. 아름답지도 편하지도 않은 그 수모를 견디며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영장에서 놀기 위해서 나는 그 수모를 견뎌야 했다. 모두가 내 머리에 달린 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시간. 모자가 벗겨질 때마다 끈을 다시 동여매고, 물먹은 꽃의 무게도 견뎌야 했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나의 투정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계속 꽃을 머리에 달고 수영장에 가야 했고, 끈을 열심히 묶었고,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엄마가 어른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는 전혀 괜찮은 것이 될 수 없었다.


‘수치’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내가 느낀 것은 수치심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서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어린 나에게도 필요한 기준이 있었지만 어른들은 그 기준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 아니, 어리니까 괜찮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 조카는 이제 9살이 된다. 조카가 유치원에 다닐 때, 그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기 전에 조카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르고 싶어?”


내 물음에 조카는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했다. 거울 속 자신의 앞머리를 가리키며, 적당한 길이와 끝 라인을 손가락으로 그리면서 설명했다. 그리고 미용사는 조카의 요구에 맞는 스타일을 완성해 주었다. 어린이 손님은 웃으면서 미용실을 나왔다. 아마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유치원에 갔을 때, 그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또 그렇게 결과를 얻었으니까.


삶에서 내가 원치 않았던 것으로 인해 겪게 되는 난처한 것들을 모두 몰아내며 살고 싶다. 남들의 시선과 기준을 신경 쓰지 말라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 기준이 내 기준에, 스스로에게 향하는 시선에도 영향을 준다. 내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남들의 말처럼, 쉽게 괜찮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남들이 쉽다고 말하는 것들이 내게 어려운 일이라면 그건 어려운 일이다.


살면서 내가 겪었던 수모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수모를 견디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이 괜찮다고 말해도 내가 괜찮지 않다면 그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괜찮은지 물어봐 줄 수 있는 어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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