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오 Apr 15. 2020

그게 왜 나빠

양껏, 마음껏 사랑받고 싶은 게 왜 나빠

얼마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일을 했다. 늘 나를 만나면 손을 뻗어 안아주는 아이가 있었다. 내가 안아주면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


내가 안아주면 내게 꼭 그렇게 말한다.


‘7살, 외동딸. 아침 일찍 엄마가 출근하시는 길에 외할머니 댁으로 간다. 할머니와 기다렸다가 유치원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간다.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있다. 친구들도 있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면 좋겠다. 아침에 선생님을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

그 아이가 나를 안아줄 때면 주변을 살폈다. 혹 다른 아이들이 볼까 봐. 다른 아이들이 서운해할까 봐.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결국 나를 힘껏 안아주는 그 아이에게 늘 부족한 마음을 주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가끔 동생이 태어나면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에게 돌아올 사랑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전과 같이 사랑하겠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내 것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하고, 내게 돌아오던 당연한 시선들이 다른 곳을 향하기도 한다. 사랑은 달라지지 않지만 내가 느끼는 사랑은 달라진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고, 그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주면 좋겠다는 그 마음.


아이들은 늘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미움도. 그런데 그런 솔직함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자신의 표현에 돌아오는 상대의 반응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런 경험이 표현의 폭을 넓히기도 좁히기도 하며,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소화시킬 능력을 키우기도 한다. 말로는 이리 잘 알면서 나는 결국 실수를 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줄 수 없었다면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모두 표현했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이 상처 받을 일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보여준 사랑에 충실히 답했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더 잘 보여주고, 말해줬어야 했다. 모든 아이들이 다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7살 아이처럼 충분히 사랑받고 싶다.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다. 준만큼 받고 싶고, 받은 만큼 더 주고 싶다. 나는 양보하라는 말이 싫었다. 나누라는 말이 싫었다. 나부터 충분하게 가져보질 못했는데 그 마저도 나누고 양보한다면 계속 부족할 것 같았다. 그리고 늘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가지고 싶었다. 내 것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관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사이. 누구도 나의 소유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도 되는 관계. 아마 평생 그런 관계는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그렇게 욕심내며 살고 싶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싶다.


그게 왜 나쁠까. 행복하고 싶어 욕심내는 것은 이기적인 것일까. 다들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모습이 되는데. 내 행복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사는 것이 과연 맞는 답일까. 나는 욕심내며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기에서 여기까지 오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