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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19. 2020

'스무스'를 스무스하게

힘을 들여야 이룰 수 있는 것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병원까지 오는 동안에는 잠잠했다. 접수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 앉아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비가 쏟아진다. 창 너머로 내리는 빗줄기는 빗금을 그린다. 사람들 머리 위 우산과 나무들이 방향 없이 흔들린다. 카페에 자리하는 이들도 늘어간다. 내 번호는 다가오지 않는다.


내 앞으로 여전히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챙겨 온 책(스무스/태재 지음)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최근에 새로 장만한 책으로(여전히 읽지 않은 새책들이 책장에 쌓여있지만 읽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은 늘 서둘러 온다.) 수영을 하며 남긴 작가의 기록물이다.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했을 경험을 그도 했을까, 비슷한 상황을 어떻게 다르게 말했을지 궁금했다. 기다리는 시간에 책을 읽기로 했다.


그가 처음 수영장을 찾은 시기의 문장들까지 읽었다. 재밌다. 처음 수영장에 들어설 때의 낯섦과 어리둥절하던 모습. 평범한 모습도 비범해 보이고, 할 줄 알던 모든 것이 처음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 마치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비밀스러운 사건이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지는 공간. 나를 제외한 모두가 능숙하며, 공간마저 나를 능가한다. 처음 수영을 등록하고, 강습을 듣기 시작했던 내가 둥둥 떠오른다.


나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내가 첫 발차기를 하게 될 레인을 찾았다. 모든 것이 '스무스'하지 못했다. 엉덩이로 앉아도 내 가슴께까지 오는 낮은 풀에서 하는 발차기. 키판을 잡은 채로 물을 먹지 않지 않기 위해 애써 머리를 들던 나. 허벅지와 발목의 통증. 옆 레인에서 유유히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언제 저 사람들처럼 나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던 순간. 모두가 준비운동을 하는데 아무리 강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나는 자꾸 틀렸다. 


머리보다 몸의 비중이 더 커서



머리로 안다고 몸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안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몸이 따르지 않는 것이 수두룩하다는 걸 이해하는 데에도 품이 많이 들었다. 마음도 많이 들이고. 수영을 하면서 배우는 숨쉬기가 그랬다. 태재가 숨쉬기를 시작하던 때를 읽으며, 나의 숨쉬기를 떠올린다. 모든 강사들에게는 강습을 위한 지도서 혹은 공유폴더에 문장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장소와 시기가 다른데 그와 내가 들은 문장은 같았다. 물에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머리를 들어 올리면 안 되었다. 머리는 뒤로 젖히듯, 손으로는 물살을 힘 있게 갈라야 했다. 물 위에서 숨을 들이마시려면 내 얼굴이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나는 어째서 내 머리를 뒤도 젖혀야 할까. 그렇게 머리와 몸이 싸우다 보면 결국 승리하는 쪽이 나온다. 태재의 말처럼 '머리보다 몸의 비중이 더 커서' 몸이 알게 되면 머리가 따라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리의 힘보다는 힘의 논리가


몸이 머리를 이기고 난 후부터 주말에 종종 홀로 자유수영을 다녔다. 혼자 배운 걸 연습하고 있으면 내 옆으로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수영을 하시는 어르신들을 뵐 수 있다. 자유형에서 배영으로, 배영에서 평영으로, 평영에서 접영으로. 내 옆으로 앞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홀로 수영을 하면서 스스로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물을 차고, 갈랐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상보다 비루하다. 25m 레인도 몇 번을 멈추고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려면 다리는 쉬지 않고 물을 차야 한다. 수면 위로 팔을 들어 올릴 때에는 힘을 빼야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힘주어 물을 갈라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앞으로, 멀리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더 멀리 가는 날이면 뭍으로 올라온 몸이 아주 무거워졌다. 옆에서 아주 '스무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두가 내 생각처럼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앞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힘을 들여야 했다. 


불가능했던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책 표지에 적혀 있다. 불가능이 가능한 일이 되는 것, 심지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는 것. 가능하다고 믿으며 책을 읽어 나가려 한다. '스무스'를 스무스하게 읽고 싶지만 계속 멈춰 선다. 숨쉬기 한 번 하고 수영장 바닥에 발을 딛고 선 것만 같다. 지금까지 내가 헤엄쳐 온 거리와 앞으로 남은 거리를 확인한다. 그가 남긴 건 10개월간의 수영장 에세이인데, 나는 왜 계속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 그가 자유형 인간으로의 삶을 시작했던 날의 기록을 다시 들춰본다. 


자유형 인간으로의 삶. 이제 시작이다.


그의 문장을 힘주어 되뇐다. 문장이 가진 힘을 내게 새겨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기까지, 다시 뭍으로 올라와 힘차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차고, 가르며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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