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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16. 2020

무릎을 세우고 앉는다

그럭저럭 안심이 된다

비가 내리는 날,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어릴 적 자주 넘어졌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여기저기 수시로 부딪혀 멍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늘 다치고 멍이 들어도 조심성은 늘지 않았다. 다친 자리를 또 다치기는 부지기수다.


늘 마음이 조금씩 앞서 달리던 나는 자주 넘어졌다. 하루는 바닥에 붙어살고, 하루는 지면에서 5cm는 떠있는 상태로 살았다. 매일 위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넘나들다 보니 몸이 성할리 없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까짓 거, 그냥 먼지 털고 상처에 약 좀 바르면 괜찮아지는 건데.


‘에잇! 뭐 어때, 뛰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지!’


생각처럼 일어서는 게 쉽지 않았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얼굴부터 처박고 상처에 약은커녕, 상처 난 무릎에 뭍은 흙을 털어낼 정신도 없이 다시 달려서 도망쳤다. 오늘은 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미끄러졌다. 금방 털고 일어나 옷도 많이 젖지 않고 다친 곳도 없었다. 잘 넘어지다 보니, 낙법까지는 아니지만 크게 다치지 않는 법을 몸이 체득한 것 같다. 어린이로 살 때는 제 속도도 가늠하지 못하고 달리다 아스팔트 위로, 흙 위로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다. 늘 무릎이 성치 않았다. 그래도 새살이 잘 돋아서 흉은 지지 않았는데 내 양 무릎에는 거뭇한 흉이 남아있다. 그 상처는 고등학생 때 넘어져 생겼다.


열일곱에는 수시로 넘어졌다. 그 시절에 얻은 상처로 내 양쪽 무릎에는 오랫동안 흉터가 크게 남아있었다. 아주 더운 여름에 넘어져 얻은 상처는 너무 커서 꽤 오래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았다. 붕대는 무릎 위부터 아래 정강이까지 감고 있었다. 매일 소독을 할 때마다 상처에서 올라오는 고름과 붕대를 떼어내는 고통이 넘어지던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상처에서 나는 피보다 더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내달리던 나의 모습이. 날이 더워 붕대에 습기가 차 열일곱 살의 상처는 더욱 더디게 아물었다. 아픈 자리는 퉁퉁 붓고 열기까지 있어 여름에도 반바지는 안 입던 내게는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도 딱지가 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살이 돋았다.


전과는 색도 다르고, 촉감도 다른 마치 얇은 막을 씌운 것 같은 새살이. 손가락으로 만지면 부드럽고, 가느다란 주름들이 생겼다. 색은 주변보다 어두웠다. 주위보다 여린 살인데 더 어두운 빛이었다. 여린 부분은 늘 조금씩 더 어둡고, 불안한 것 같다. 새살이 앉은자리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맨질맨질했다. 그 촉감이 좋아서 혼자 방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새살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나는 자주 혼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왜 그리 불편하게 앉는지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앉은 모양을 보면 굳이 불편하게 앉아 있는지 물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손으로 다리를 끌어안는다. 내 몸이 더 동그란 모양으로 있으면 한다. 머리까지 무릎에 끼워 넣으면 좀 더 작아질 수 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조금 안심이 됐다. 넘어졌던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몰라볼 것 같았다. 창피하고 아파서 우는 게 나인지 누구도 모를 것 같았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면서 자기 얼굴만 거리는 것처럼. 나는 나를 동그랗게 말아서 가리면 누구도 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까. 가만히 나를 안고 있으면 연한 살이 올라와 다시 고개를 들고일어날 수 있었다. 열일곱의 나는 그렇게 많이 웅크렸다. 위로 아래로 넘나들다 상처가 짙어지면 웅크리기를 반복했다. 나도 내가 어디쯤에 있는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춘기라는 말보다는 그냥 매일이 불안하다는 말이 적합하다. 동그랗게 작아져서 돋아나는 새살을 더 연하고 약한 부위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내가 입은 상처는 누구도 아물게 해주지 않았다. 나 말고는 상처를 보듬고, 안아줄 이가 없었다. 다들 자기 상처를 돌보느라 나는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 있느냐 물으면


"나는 이게 편해."


으레 그렇게 답했다. 이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거짓이기도 하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은 참 불편하다. 10분이 넘어가면 다리가 저릿하다. 하지만 그렇게 잠깐이라도 나를 부둥켜안고 있으면 조금 나아진다. 여전히 잘 넘어지고, 멍들지만 나도 모르게 체득한 낙법 덕에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낙법을 쳐도 크게 다친다.


어른이 되어서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보다 안으로 커지는 상처가 늘었다. 아니, 여린 살이 다 아물고 흉터가 된 줄 알았는데, 덜 아문 채로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를 다친다. 항상 그 자리에 상처가 난다.


비가 오는 날 횡단보도에서 넘어졌다. 그냥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친 곳도 없고, 옷도 멀쩡했다. 나는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멀쩡하게 횡단보도를 건넜고,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그런데 혼자일 때는 오래 웅크리게 된다. 자꾸만 벌어지는 상처를 매만지느라 아무리 다리가 저려도 일어설 수가 없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넘어져도 울지 않고 일어설 수 있게 되지만,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더욱 더뎌진다. 새살이 돋아도 늘 흉터가 남는다. 곳곳에 남은 상처를 감추느라 더욱 웅크리게 된다.


나는 여전히 자주 무릎을 세우고 앉는다. 그렇게 앉으면 그럭저럭 안심이 된다. 그래도 그냥 울면서 일어나고 싶다. 아프고 힘들다고 소리치면서 꺼이꺼이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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