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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l 11. 2020

너무 깊이 들이마시지 마세요

세상에 없는 계절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집었다.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집 밖을 나설 때, 책을 고른다. 손에 잡히는 책, 지난밤에 떠올랐던 책, 늘 가방 속에 넣어 다니는 책. 오늘은 손에 잡히는 책으로 정했다. 가방에 넣어둔 에세이집을 책장에 꽂아 두고, 새로 고른 시집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드르륵 


무거운 나무문을 옆으로 밀며 밖으로 나왔다. 밤이 어둑한 곳에 네가 홀로 앉아 있었다. 나이가 어리지만 나보다 똑똑한 친구.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계속 만나게 되는 관계. 너와 나 사이에는 다른 친구가 있어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친구라는 말로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서로의 친구를 아는 사이. 함께 만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같은 곳에 있는 사이.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나는 너를 응원했다. 어린 너는 내게 어려운 사람,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였다. 


“피워 보고 싶어요.” 


너에게 물었다. 조금 오른 취기를 빌어 낸 용기였다. 너와 나에게 공통점이 있었을까. 아마 조금은 들뜨고, 붉었을 나의 표정을 보며 너는 담배를 건넸다. 방금까지 혼자 앉아 피우고 있던 담배. 건네받은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입으로 가져갔다. 나를 바라보던 넌 웃었을까. 기억이 흐릿하다.


“너무 깊이 들이마시지 마세요.”


네가 하는 말 사이로 내가 내뿜은 하얀 연기가 사라졌다. 그렇게 두어 모금쯤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돌려주었다. 취했고, 기분이 좋았다. 콜록대지도 않았다. 물론 충고처럼 깊이 들이마시지 않았다. 그저 입안에 머금었다가 조금씩 내뱉기만 했다. 담배를 피운 게 아니라 그냥 시늉만.. 아마 나는 살면서 담배를 피울 일이 다시없을 거라 생각했다. 술은 계속 마실 것 같지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서로에게 말을 건넨 것 같은데, 너와 나 사이에 오고 간 것이 있던 것 같은데.


파라락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가방 속 시집을 꺼내 두 손에 쥐고 책장을 넘겼다. 몇 장 넘어가지 않아 책장이 멈췄다. 25쪽. 종이 위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내가 쓴 아주 짧은 편지다. 잊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평생을 지나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기억은 할 수 있겠죠. 

제주에서 보낸 귤이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되었네요. 다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전할 길 없는 말과 마음만 남았네요. 당신이 조금은 편안해졌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선택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선택을 존중합니다. 당신께 좋은 친구는 못 되었겠지만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잊고 있었다. 누구도 읽지 않았을, 혼자 쓰고 혼자 읽었던 편지였다. 너를 기억하며 적었던. 메모지 위쪽에 적힌 시의 마지막 연을 소리 내 읽었다. 


밤새,

남은 새

몸에서 밀려오는 요의(尿意)


봄밤 / 김경주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수록


몸에서 밀려오는 요의. 많이 울었다. 너와 나의 친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몹시 아파 그를 안아주지도,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너를 기억하는 어떤 자리에도 나는 함께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없었으니까. 그저 너를 기억하는 것뿐. 혼자 우는 일 말고는 없었다.


겨울 여행에서 보낸 귤을 받았을까. 상자 속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봄이었다. 전해지지 않을 인사를 전했던 계절은 봄이었다. 잊고 있던 편지에 길지 않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밤. 나누었던 몇 마디의 대화. 집을 나서기 전, 괜스레 펼쳐본 시집. 몇 해전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시집은 책장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 밤 담배를 받아 든 나를 향해 네가 했던 말이 스쳤다.

 

“너무 깊이 들이마시지 마세요.”


나는 잘 지냅니다. 가끔 생각이 납니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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