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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May 16. 2020

아직은요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지냈어요?"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 안경 너머의 눈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물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냥, 좀 바쁘게 지냈어요. 멀리 가기 전에 사람들도 만나면서요."


이제 세 번째 만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나는 멀리 거처를 옮기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은지. 그리고 지금 내 상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지. 자꾸 복기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가까운 과거도 먼 과거도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다 더 멀리 가게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생각이 멈추지도 않고, 눈물도 멈추지 않는다. 내가 말을 하면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하다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시선이 돌고 돌지만 멈출 자리는 찾지 못한다.


"과거가 더해져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 복기는 필요하지만, 그 일로 다시 우울해지고 어려워지면 안 돼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야 하잖아요..'


그의 말을 속으로 반복해본다. 모두가 지금을 살고 있고, 그렇게 해야 하지만 너무 어려운 일 같다. 다들 내게 해주는 그 말처럼 스스로의 '지금'을 살고 있을까. 나는 멀게만 보이는 지금으로 갈 수 있을까. 복잡한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 머리가 당기듯이 아파요. 누가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팔, 다리 근육은 자주 움직이지만 머리나 목, 어깨의 근육은 움직임이 없어서 긴장이 누적된다고 했다.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누적된 긴장, 피로감에 통증이 생긴 것이라 한다. 하루에 쌓인 피로감과 긴장으로 인한 '긴장성 두통'


"몸이 위험하면 도망치려고 하잖아요.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 몸은 여전히 불안의 경험으로부터 한껏 웅크리고 있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긴장한 채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에는 부적처럼 두통약을 들고 다녔는데.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래 도망칠 준비를 하며 지내왔나 싶었다. '지금'으로 나는 갈 수 있을까. 오늘도 이렇게 어제에 묶여 있는데.


"나무를 심으면 다지잖아요. 뿌리를 잘 내리라고. 그렇게 다져주는 거예요."


다 자란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나를 더 다져야 하는가 보다. 늘 도망칠 각오를 하다 보니 뿌리가 자라서 깊이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나. 두통이 사라져도 나는 계속 나를 다지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언제든 다시 두통이 시작될 수 있다고.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시간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어쩌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나와 싸우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마주할 테지만 오늘은 더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했다. 그리고 정 싫다면 나는 달아날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나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멀리 달아날 거다. 내가 위험하다면, 그렇게 나를 도망치게 둘 것이다.


"아직은요, 다른 곳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어요."


문을 나서기 전에 내가 말했다. 내 여유를 찾는 것이 일단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지금은 여기에 머물게요. 번거롭고 품이 들어도 아직은 더 이곳에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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