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오 Jun 18. 2020

"좋은 계절이 왔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이라는 영화다. 그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몇 있다. 삶과 죽음이 너무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


삶에 서서 죽음을 배웅하는 모습


'환상의 빛'의 주인공 유미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기억이 있다. 학창 시절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죽어야겠다며 집을 나선 할머니.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철로에서 기차를 마주 보고 걸으며 떠나버린 남편 이쿠오. 유미코는 떠나는 할머니를 말리지 못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쿠오가 집을 나서는 마지막 날 저녁에도 그를 배웅하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할머니와 이쿠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순간은 남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쿠오가 떠나고 유미코는 불현듯 그의 자전거를 타고, 그가 달렸을 것 같은 길을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쿠오가 타던 자전거는 색이 바래버렸다. 그는 할머니가 떠나고 난 후처럼, 이쿠오가 떠나고 나서도 살았고, 아들은 자랐다. 시간이 흘러 유미코는 타미오와 재혼을 해서 다른 가정을 꾸렸다. 그가 아들과 도착한 새로운 곳에는 바다가 있고, 겨울이면 많은 눈이 쌓였다.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는 타미오의 아버지와 그의 딸이 함께 였다. 바다에 사는 모두가 가족 같은 곳,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삶.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겨울의 눈이 녹는 동안 유미코의 아들과 타미오의 딸은 달리고, 웃고 떠들며 함께 자랐다. 그곳에서 유미코는 밥을 짓고, 학교에 가는 딸을 배웅하고, 집을 청소한다. 고요하고 잔잔한 일상. 새로운 가족과 또 다른 모습의 삶은 계속되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은 흘렀다. 그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함께 살아갔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으며 같이 하는 일상이 쌓였다.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도 유미코는 빛으로 나오지 못한다. 조금은 뒤에 앉아 고개를 숙인다. 빛이 드는 자리는 그의 자리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반년 정도를 보내고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미코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자신이 떠나온 곳을 찾는다. 가족을 만났고 쿠오와 살던 집, 그가 다녔던 직장, 그와 함께 갔던 카페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바닷가 집으로 잊혔을 거라 생각했던 기억들이 함께 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순간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유미코를 흔들었다. 늘 조용히 보내던 일상에 조금씩 불안이 함께 쌓였다. 계절은 소리 없이 바뀌어 갔다. 그러던 어느 새벽, 홀로 잠에서 깬 유미코는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마을의 토메노 아주머니가 창밖으로 보였다. 게를 잡아다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바다를 향해 가는 그를 유미코가 배웅했다. 그리고 바람이 거세지며 조용하던 바다가 달라졌다.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간 토메노 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지난다. 유미코에게는 어떤 기억이 덮쳐왔을까. 그의 잠잠한 듯 고요하던 바다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울지 않았지만 작은 소리에도 일어서는 그를 보며 내가 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토메노는 약속한 게를 가지고 돌아왔다. 유미코는 토메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그가 들고 온 게를 조용히 들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는 다시 울었다. 고요하고 잔잔하던 일상이 깊은 곳에서부터 일렁이고 있었다. 줄곧.


죽음을 뒤따르는 길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앉아 있는 유미코. 그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무엇이 그를 흔들고 있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홀로 집을 나와 동네를 거닐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버스는 멈추었지만 그는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장례 행렬을 따라갔다. 일렬로 언덕을 내려와 바다로 향하는 행렬. 그 뒤를 따르는 유미코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바다에 다다른 이들은 마지막으로 불을 지폈다. 행렬은 지워지고, 죽은 이를 보내는 불과 연기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유미코만이 남았다. 남편 타미오가 차를 타고 그를 찾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왔다. 두 사람은 불을 등지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유미코가 물었다.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쿠오의 죽음을.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고. 자신이 가진 불안을 뱉어냈다.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


타미오는 답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배를 타던  시절. 배에서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 아름다운 바다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그렇게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계절이 왔다. 집 앞에서 타미오와 아이들은 새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유미코가 계단을 내려온다. 집을 청소할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빛을 등에 지고 닦았던 계단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와 평상에 앉아 가족을 바라보는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으며 말한다.


환상의 빛 스틸 이미지


"날씨가 많이 풀렸죠?"

"좋은 계절이 왔어."


두 사람에 얼굴에 새로운 계절의 밝은 빛이 가득하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가족들처럼 환한 빛을 한껏 받으며 살지는 않지만 이 좋은 계절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빛이 드는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영화는 끝났다. 늘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던 유미코가 빛으로 나 앉은 후에. 그의 불안은 그 빛과 함께 사라졌을까. 그가 등지고 선 어둠은 여전히 짙어 보인다. 그래도 그가 얼굴 가득 빛을 받으며 앉은 모습에 함께 시름을 내려놓았다.


모두가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을 안고 있을 것이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 깊은 구석에 담아 둔 생각과 마음이 불현듯 수면 위로 올라오면 혼란과 불안에 요동치는 매일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속 답이 없는 불안과 싸우고 있다. 유미코가 답이 없는 시험지를 끌어안고 사는 것처럼 나와 너의 매일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일렁이는 마음을 안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앉아 너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통 저 자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일어서는 법도 그리고 발을 내딛는 법도 생각나지 않는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되는데, 한 발짝만 떼면 되는 걸 알면서도 뒷걸음치는 것이 발을 내딛는 것보다 더 쉽고 안전하게 느껴진다.


유미코는 이제 겨우 빛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다음 일이다.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그는 죽음에 등을 지고 삶을 살아냈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늘 우리 가까이 있는 그 깊은 어둠은 언제고 고개를 들지 모른다. 불안과 슬픔과 혹은 무기력함을 가지고. 하지만 좋은 계절도 늘 가까이에 있다. 항상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우리가 등을 돌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빛을 등에 내려줄 것이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마주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나는 과연 빛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담다 담그다 담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