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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n 10. 2020

담다 담그다 담기다

마음을 다 담기에는 늘 부족하다

"밥은 먹었어? 뭐해서 먹어?"


매일 하는 통화, 매일 하는 끼니 걱정. 엄마와의 통화에 늘 있는 내용이다. 아침은 먹었는지, 점심은 먹었는지, 저녁에는 무얼 먹을 것인지. 혹여 한 끼라도 굶으면 크게 잘못될 것처럼 걱정을 한가득 담아 말씀하신다.


"뭐 먹을 건 있어?"

"응, 많아. 엄마가 해 준 김치만 냉장고 가득이야."


그렇게 말하면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너머로 들린다. 오늘도 엄마와의 통화에는 '김치'얘기가 등장했다. 엄마는 텃밭에 온갖 것들을 심고, 키운다. 최근에는 열무를 수확하셨다. 엄마의 열무김치는 맛이 좋다. 열무김치가 잘 익으면 국물은 매콤하고 살짝 새콤하니 시원한 맛이 난다. 건더기만 건져 밥에 참기름을 두르고 고추장 양념을 해서 비벼 먹어도 맛있지만, 더운 여름에는 면을 삶아 함께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 나는 칼국수보다는 소면을 좋아하는데 붉고 양념해 먹는 비빔면을 유독 좋아한다. 식초와 엄마가 직접 만든 오래된 매실액을 넣어 만든 고추장 양념으로, 소면과 잘 익은 엄마의 열무김치를 함께 버무리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곁들여 먹는 맛. 날씨가 더 더워지면 어떤 방법으로 먹어도 맛있을 그의 김치가 지금 냉장고에 한 통 가득 담겨 있다.


이번 통화에 엄마는 김치를 직접 담그지 않았다 했다.


"이번에는 힘들더라구. 그래서 이모한테 담가달라고 했어. 4시간 동안 만들었다네."


엄마의 언니가 그가 기른 열무로 김치를 담갔다. 아마 나는 이모가 담근 김치는 먹지 않을 거다. 이모의 음식도 다 맛이 좋지만 나는 유독 엄마가 담근 김치만 먹었다. 오래전 기억이다. 여느 김장철처럼 그는 배추를 사서 다듬고, 절이고, 씻어 갖은양념을 넣어 김장을 했다. 엄마 옆에 앉아 붉은 속을 하얀 배추에 버무리며 끝에 붙은 배춧잎을 양념에 묻혀 먹었다. 그렇게 먹은 김치는 아직 숨이 다 죽지 않아 아삭하고, 갓 만든 양념의 매콤한 맛이 뒤섞여 싱싱하면서 시원한 맛이 난다. 그리고 배춧잎이 가진 단맛이 감돌아 입 안에 기분 좋은 뒷맛을 남긴다. 아무리 입에 넣어도 질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는 시원한 맛.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있는 맛.


한 가득이던 양념의 바닥이 보이면 수육도 얼추 익는다. 김장을 하는 날엔 수육과 갓 담근 김치로 저녁까지 배가 불렀다. 엄마는 늘 삼겹살로 수육을 하셨다. 살코기와 비계가 1:1의 비율로 붙어 있는 삼겹살로. 푹 삶아진 수육의 비계는 말랑 말랑하고, 거의 씹히는 것 없이 사르르 녹았다. 사이에 있는 오돌뼈는 씹히는 소리도 없이 목 뒤로 넘어갔다. 그렇게 푹 익혀서 씹는 삼겹살 수육은 고소하고 단맛이 감돈다. 느끼함은 쏙 빠지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비계와 어우리진 살코기는 말 그대로 녹듯이 사라진다. 나는 김장을 하는 날이면 엄마처럼 비계가 많이 붙어 있는 삼겹살을 사서 집에 간다. 월계수 잎도 잊지 않는다. 한 줌 가득 월계수 잎이 정육점의 하얀 봉지에 담긴다. 엄마는 늘 그렇듯 확인하실 테니까.


"월계수 잎도 받아 왔어?"


언제였을까. 김장을 마치고 난 후였다. 시기는 선명하지 않지만 함께 밥을 먹는데 상 위에 올라온 김치가 늘 먹던 것과 맛이 달랐다. 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이 김치 엄마가 담근 거 맞아?"

"아니, 이건 이모 김치야."


이모 김치도 맛있었다. 하지만 다시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그 김치는 더는 먹지 않았다. 그 후로 엄마는 상 위에 다른 사람이 담근 김치는 올리지 않으셨다. 김장 김치, 겉절이, 파김치, 열무김치, 동치미, 알타리김치, 깻잎장아찌, 김구이, 진미채 볶음, 고추 튀각.. 온갖 종류의 김치와 갖가지 밑반찬은 모두 엄마가 직접 만드셨다. 가끔 다른 사람이 만든 반찬이나 가게에서 사 온 반찬을 내어 주시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늘 모든 음식을 손수 만드셨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을 하고 돌아오셔서는 두 딸과 함께 김을 구웠다. 불에 달군 팬에 김을 한 장, 한 장 구우면 나와 동생은 자리에 앉아 구운 김에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쌓는다. 짭짤한 맛에 고소한 기름 향, 그리고 바삭한 식감. 앉은자리에서 구운 김은 바로 두 딸의 입으로 들어갔다. 손에 묻은 기름과 소금기까지 먹고 나면, 김을 큼지막하게 잘라 봉지에 넣고는 냉동실에 넣었다. 두고두고 먹을 수 있도록. 엄마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만든 반찬들이 우리의 배를 채웠다. 주말에는 종종, 아니 자주 집에 남을 우리들을 위해 전날 밤부터 재료를 손질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셨다. 나와 동생은 그런 엄마 옆에서 꽁다리를 집어 먹으며 아침을 먹었다. 우리가 더 자랐을 때는 엄마가 재료를 준비하시면 내가 김밥을 쌌다. 그의 음식이 우리의 배를 채우고, 함께 보낸 시간이 마음을 채웠다. 서로에게 살가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하며 웃었던 기억,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낀 행복이 서로를 지키고 버틸 수 있게 했다.


두 딸이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는 지금도 엄마는 우리의 끼니를 염려하신다. 집을 찾을 때면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며칠 전부터 분주한 하루를 보내신다. 딸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늘 손이 많이 간다. 동생은 파김치를 좋아해 엄마는 수시로 파김치를 담가 보내신다. 이번에 담근 파김치는 유독 알싸하게 매운맛이 많다고 하셨다. 그가 만드는 김치는 늘 내용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양념을 많이 해서 맛이 진하게 밴다. 그래서 김장을 할 때면 배추를 다 버무리고 남은 양념에 쪽파를 버무려 막내딸이 좋아하는 파김치도 함께 담근다. 그리고 남은 양념은 통에 담은 배추 위에 꾹꾹 눌러 담긴다. 그렇게 많은 양념은 김치가 푹 익어 맛있는 신맛을 낼 때, 찌개를 끓이거나 볶음밥을 할 때 감칠맛을 더하는 재료가 된다. 다른 양념을 더하지 않아도 충분한 간을 주고, 더욱 진한 맛을 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김치로 음식을 할 때에는 부수적인 재료를 더하지 않는 편이다. 이미 그 안에 많은 것이 충분히 담겨 있다.


최근 내가 이사를 하기 전에 엄마는 먹고 싶은 반찬을 물었다. 멀리 가는 내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알타리 김치와 열무김치, 진미채 볶음과 고추 튀각을 해달라 했다. 그리고 지난겨울에 그가 만든 갓김치와 김장김치도 한 통씩 가져왔다. 냉장고 가득 그의 마음을 담아 이사를 했다. 엄마의 오래된 마음처럼 김치도 처음보다 익었을 때 더욱 맛이 진해진다. 처음 담글 때와 익어갈 때의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아삭거리던 식감도 조금을 물러지고, 매운맛도 덜해진다. 하지만 강렬한 맛이 사그라들면 모든 음식과 잘 어울리는 맛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알타리 김치는 라면과 엄청 잘 어울려서 잘 익으면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한다.


작은 알타리 아래로 짧게 달린 줄기. 세 덩어리를 접시에 담고, 동네에서 파는 튀김 만두를 샀다. 그리고 들어오는 길에 컵라면을 하나 샀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점심을 차렸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 알타리를 한 입 베어 문다. 아삭 거리는 무가 양념과 잘 어우러져 씹힌다. 


엄마, 김치가 정말 맛있게 잘 익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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