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오 Jun 20. 2020

모두의 거실

함께하는 자리를 가꾸는 정성

"어디서 왔어?"


조용히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내게 프레임 너머의 할머니가 물었다.


"저,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저기 32동 살아요."

"그걸로 뭐 하는 거야?"

"그냥 혼자 찍는 거예요. 찍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이걸 왜 찍는 거야?"

"재밌잖아요. 꼭 집에 있는 거실 같아요."


나를 향해있던 몸을 돌려 앉으시고는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으로 살짝 웃으셨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테이블을 지지하는 다리에 올리셨다. 마치 '자, 찍어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덕분에 널찍한 야외 거실 사진을 찍었다.

모두의 거실  by 운오

요즘은 새로운 동네를 걷는 게 일이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걷는 데 흙바닥에 장판이 깔려 있고, 선반과 상판을 연결해 만든 거대한 테이블과 어울리지 않는 의자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날 때면 늘 나이를 지긋이 드신 어르신 몇 분이 둘러앉아 계셨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 놀러 온 것처럼 마주 앉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누가 만들었을까. 저 멋진 거실을 누가 저기에 두었을까. 높이가 맞는 선반 두 개를 고르고, 그 위에 올릴 상판에 장판을 씌워 깔끔히 마감을 했다. 그리고 거실에 카펫을 깔듯 흙 위에 장판을 깔아 두었다. 심지어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꽃들이 정성스레 놓여 있다. 처음에는 화분인 줄 알았지만 널찍한 화병에 모양을 잡아 꽃아 둔 거였다. 거실 위로는 높은 나무들이 만든 그늘이 있어 더운 날에도 쨍한 빛이 덜 들어온다. 누구라도 더위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예전에 시골집을 찾아갈 때면 동네 어귀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몸통은 어른 여럿이 둘러싸도 잡기 어려울 만큼 두꺼웠고, 나무가 드리운 초록은 작은 집 한 채의 지붕만 했다. 커다란 나무를 가운데 두고 돌로 만든 의자가 둥글게 있어서 어른들은 그 자리에 앉아 쉬었고, 어린아이들은 주변을 뛰어놀았다. 마을 모두가 쉬는 시골의 사랑방. 나처럼 부모님 따라 시골집에 온 아이들, 그 동네에 살던 아이들 모두 그곳에 모이면 그냥 동네 친구가 됐다. 아무리 뒤져도 내가 할 게 없던 시골집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변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던 친구.

모두가 돌아간 자리  by 운오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나와 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서로 눈짓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 거실을 지날 때면 뵐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옆으로 자리를 채우는 또 다른 이들이 늘 있다. 누구는 나처럼 32동에 사실지 모르겠다. 그분들에게도 서로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날들이 있다. 옆에 있는 타인의 온기만으로도 다시 돌아갈 용기가 생기는 날들. 모두가 함께 꾸린 거실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가지 않을까.


모두의 거실 테이블 위의 꽃이 바뀌었다. 나와 당신을 위해 함께 하는 자리를 가꾸는 정성. 서로를 위해 그 자리에 남겨둔 정성이 모두에게 용기가 되는 매일이 이곳에 있다. 나도 하루는 저 거실에 앉아 이름 모를 이들의 정성을 마주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계절이 왔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