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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n 24. 2020

퇴근하지 않아요

기타로 살고 있어요

인터넷으로 통장을 만들려 했다. 통장 개설을 위해 직업을 채워 넣어야 한단다. 직업란에 커서를 놓고, 스크롤을 내렸지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없었다. 


최근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단어에 ‘백수’가 추가되었다. 놀고먹는 나는 오늘까지는 백수다. 하지만 퇴직금을 털어 책도 만들고,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생각에 수업을 듣고, 직업은 없지만, 딱히 놀지는 않는 반백수. 어떻게 말해도 백수인데 말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이 멋진 꿈의 직업은 통장을 만들 때 쓸모가 없다.


직업 없이 3개월을 살았다. 사람들을 만나 소개할 때, 이름과 나이 외에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본다. 어느 직업군에도 들지 않는 백수이며, 집에서 청소와 설거지, 빨래를 맡아서 하고 음식을 준비하니 ‘주부’라 말할 수 있다. 허나 ‘주부’의 역할은 하지만 일삼아 하는 것은 아니다. 외에도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계속 쓰고 있으나 이는 다들 취미 활동이라 여길 테니 달리 명명할 단어가 없다. ‘구직자’ 이거나 ‘실직자’로 살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나는 구직 중이 아니며, 실직은 했으나 직업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 물러났으니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나를 설명하고 소개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닌데 왜 계속 자신을 설명할 말을 찾게 될까. 인정받고 싶어서일까. 이렇게 계속 생각하는 건 왜 그런 것일까. 이유도 모르는 채 지속적으로 하는 것들에 과연 이유가 있기는 할까. 있다면 타당한 걸까. 그냥 나는 시간이 많아서 헛짓거리하는 걸까. 시기를 놓친 자아 찾기를 이제 하는 걸까. 찾는다고 찾아질 거리가 되나.’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는 질문만 늘어나는 매일이다. 쉬고 싶다고, 백수가 되어 꿈을 이루겠다 했지만 멈추면서 찾아온 불안은 떨쳐지질 않는다. 나는 계속 납작해지고 통장은 빈곤해진다. 내가 택한 백수의 삶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아니 내가 계속 나를 아래로 아래로 짓누른다.


빈곤한 마음으로 통장을 개설하는 대신 이력서를 작성했다. 평소 관심을 가졌던 일에 지원해 보려고. 좋아하는 것 중 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하던 일과 다른 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을 꾸면서 말이다. 


이력서에는 학력과 경력 사항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해야만 한다.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막상 나를 소개하려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문이 막히듯 글문이 막혔다. 턱턱 막혔다. 차라리 누가 물어봐 주었음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이 일을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왜 일을 그만두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왜 쓰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누가 묻는다고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까. 자기소개서에도 제목이 필요하다는 데 그것조차 적지 못하고 창을 닫았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만 보다 새로운 꿈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퇴직금을 넣을 통장 개설을 마무리했다. 스크롤을 내려 직업을 골랐다. 


‘기타’


당분간은 기타로 살기로 했다. 백수의 꿈을 이루었지만, 그 꿈의 직업을 적어 둘 칸이 없어 기타로 대신하며, 오늘까지는 출근도 퇴근도 하지 않는 삶을 더 살아보기로 했다. 질문의 답은 천천히 찾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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