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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오 Jul 25. 2020

베이비

울다가 웃다가

내게는 오래된 티셔츠 한 장이 있다. 살짝 어둡고, 빛바랜 파란색의 티셔츠에는 영어로 'BABY'라고 프린팅 된 단어가 있다. 베이비. 베이비.


2019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베이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세탁을 했다. 여느 때처럼 건조대에 있던 옷과 수건을 개켜서 서랍장에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베이비 티셔츠는 입지 않았다.


베이비 티셔츠는 7년가량 입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드라마에 입고 나왔던 티셔츠인데, 색도 프린팅  단어도 모두 맘에 들어 바로 구매했다.  후부터 좋아하는 옷이다. 봄부터 가을, 겨울에도 입을  있는 날씨에는 자주 입었다. 재질이 얇은데도 세탁을 해도  상하지 않고,  원하는 모양이 됐다. 입고 있으면  맞아 편안했다. 색도    없는 색이라 더욱 좋았다. 베이비 티셔츠를 입고 밖에 나가도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없는 나만의 . 그렇게 생각했다.


  ,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 베이비 티셔츠를 입어야겠다 생각하고  넣어두는 서랍장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옷가지를 뒤적여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날은 다른 옷을 입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옷이 들어있는 곳은  뒤졌다. 결국 서랍장의 모든 옷을 바닥에 펼쳐두고야 알았다. 베이비 티셔츠가 없다. 어디에도 없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옷이 있는 곳은 모두, 혹시 몰라 가방까지.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없다.


이번에는 기억을 되짚어 보자. 2019 5월쯤이었다. 마지막으로 입었던 기억은.  후에  입었을까. 아니면 동생에게라도 빌려 주었나. 아니다.  동생은 내가 좋아하는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다. 2019 여름의 나는 서랍장을 뒤져 오래도록 입지 않는 , 좋아하지만 더는 입을  없는 , 서랍장에 있는지 조차 몰랐던 옷들을 꺼내 정리했었다. 어쩌면  무더기에 끼어 버려졌을까. 옷더미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렇게 경솔하게 옷을 버렸을까. 다시 한번 들춰보지도 않고, 미련도 없이. 정말 베이비 티셔츠는 그렇게 버려진 걸까. 다시는 입을  없는 걸까. 울면서 옷장을 다시 뒤졌다. 하지만 없었다.


옷이 없는 것을 알고 나서 같은 옷을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드라마 제목, 배우 이름, 브랜드 명까지 차곡차곡 넣어가며 검색했지만 헛수고였다.  옷을  때는 아주 짧은 검색만으로 가능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나. 아니, 정말 나만 입었던 옷이었나. 다시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맘에  들었던 베이비 티셔츠는 없었다. 색도 디자인도 비슷한 옷을 찾아봤지만  옷과 같을  없다는  확인할 , 아무리 닮아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해졌다. 나의 베이비 티셔츠는 없다. 이제 더 이상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 지자 마냥 울었다. 온갖 기억이 떠올랐다.


베이비 티셔츠를 처음 입고  앞에 섰을 . 티셔츠 위에 적힌 단어를 말하던  목소리와 나를 보며 짓던 옅은 웃음. 장난스레 던진 너의  마디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티셔츠를 입어야   있는 것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같아 계속 눈물이 났다. 베이비 티셔츠를 꺼내 입을 때마다 조용히 웃던 나의 모습. 그렇게 날 웃게 하던 누군가. 어쩌면  목소리와 웃음의 주인공은 기억도 하지 못할  순간이 베이비 티셔츠를 나에게만 유일한 티셔츠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만의 추억으로만 남아버렸다는 사실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혼자만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마저도 이제는 아주 사라져 버렸다. 다시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방법을 모를 때에는 우는  말고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2020년. 이사를 했다. 아주 오래 살던 곳을 떠났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렸다. 가지고 올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추렸다. 옷장을 다시 샅샅이 뒤져 전보다 더 많이 버렸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사를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여름이 다가올 즈음이었다. 밖에 나가기 위해 서랍장을 열어 옷을 뒤적였다. 그런데 익숙한 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보이지 않던 익숙한 색이. 나의 베이비 티셔츠. 빛바랜 파란색 티셔츠. 입으면 가슴팍에 새겨진 'BABY'가 아주 맘에 드는 티셔츠가 돌아왔다.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서랍장 속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베이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잃어버린 것이 돌아왔을 때에는 웃는 것 말고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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