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_22

베느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5부. 아! 용신(龍神)이여



36. 개업식의 기도와 함박눈의 의미


새아침이 밝아왔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안반정밀’쪽 직원들은 오전 작업을 마친 다음 식사를 끝내고 기다리는데, 예약했던 재료가 도착하였다. 먼저 재료를 재단하고 부품에 홈을 파야 하므로 밀링 기계를 설치할 장소 옆에다가 쌓아놓았다.

오후 3시가 되자 드디어 주문했던 기계가 모두 도착하였다. 기계들은 여러 개의 작은 바퀴가 달린 운반기구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북쪽 출입문이 작아 지게차가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들을 문 앞에 내려놓은 다음 밧줄을 이용해 잡아끌어 공장 안으로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밀링을 들여보내 자리를 잡아 설치한 다음, 맨 나중에 선반을 들여와 설치하였다. 선반을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운 벽 쪽으로 위치시키기 위해서였다. 문밖에서는 눈발이 제법 날리며 출입문 안으로 들이닥쳐 땅바닥에서 녹는 바람에 바닥이 질퍽질퍽하였다. 따라서 빨리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Van이 운반용역을 맡은 직원들에게 문을 닫아달라고 부탁하자, 젖혀져 있던 철문을 힘껏 밀어 닫아버렸다. 공장 안에서는 문이 닫히자 안쪽에서 잠금 버튼을 눌러 잠가버렸다. 더 이상 출입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을 닫은 사람이 선반의 전원연결코드가 문에 낀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긴 드라이버를 이용해 안으로 전선을 밀어 넣었다. 플러그에서 전선이 조금 늘어지고 껍질이 약간 벗겨지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원연결코드는 여분으로 한 개를 더 가져왔으므로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선반을 밀링과 플라스틱 재료 옆에 임시로 위치시킨 다음 시운전을 해야 하는데 납품업자가 다가와서 기계에 대한 자세한 사양을 설명하였다. 그중 성능을 더욱 높이기 위해 당초 출력 20마력 모터를 30마력짜리로 교체한 것 외에는 아무런 변경사항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낡은 부품은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으므로 새 기계나 다름없으니 시운전을 어느 정도 해주어야 길이 들을 것이라면서 그때그때 베어링 등에 기름을 잘 쳐주라고 주의사항까지 부탁하였다.


“가만있어라, 뭐 빠진 것 없나?”

이때 인부 한 사람이 재촉하였다.

“어이 추워, 빨리 갑시다. 배도 고프고...”


이 말을 들은 납품업자는 인부들과 함께 서둘러 차에 몸을 실었다.


“자, 그러면 의문사항 있으면 전화하세요.”


납품관계자들이 모두 떠나가자 Van이 기계의 전원 스위치를 올려보았다. 기계에서는 명령을 알아듣는 것처럼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힘차게 들렸다. 길을 들이기 위해 몇 개의 버튼을 눌러 그 상태에서 당분간 자동으로 작동을 하도록 조정을 한 다음 개업식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작업대 두 대를 공장 홀 가운데 모아놓고 준비해온 고기와 음료수 등의 음식을 올려놓았다. 직원들만 모인 조촐한 개업식이었지만, 각자의 표정으로 보아 사업에 성공하여야 한다는 각오는 남다른 것 같았다.

이어 오늘 창업을 시작하는 ‘안반정밀’의 사업주인 Nguyen Thi Bao Anh 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한국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한국에서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니 먼저 두려움이 앞서고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잃고는 살 수 없는 문랑국(文郞國)의 후예들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노력하는 우리에게는 항상 우리의 수호신 Lạc Long Quân(낙용군, 龍神)이 지켜줄 것이라 믿습니다.

아울러 항상 우리를 보살펴주시고 도와주신 ‘협성정공’ 김남일 사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 제일 연장자이고 사업의 선배이며, 강력한 지원자이기도 하신 ‘협성정공’ 김남일 사장님께서 기도를 하였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우리의 착한 어린 양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가족의 곁을 떠나 오직 가난을 이겨보자는 신념 하나로 이역만리 한국 땅으로 달려와 방황하던 끝에 여기 다시 모였습니다. 가난의 탈출은 곧 평화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남을 시기한 적이 없으며, 마음으로도 도적질 한 적도 없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직 땀과 신용으로 평화의 시대에 진입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공장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 기계소리에 맞추는 듯 한 기도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문밖에서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쌓이는 눈발의 의미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이들의 뒤에는 어느 틈엔가 Mai와 남편 동철, 그의 아들 국남, 그리고 Ly가 가져온 축하의 화분을 내려놓고 함께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웃에 사는 Hue와 Dong, 그리고 Van에게 사업가의 꿈을 불어 넣어주신 ‘성진원예’ 사장님 두 부부까지 커다란 축하의 선물을 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공장 안에서는 은은히 울리는 사장님의 성스러운 기도소리가 계속 이어져 갔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행의 길로 뛰어든 아름다운 이들에게 진정한 용기를 내려주시옵소서.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그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배고픈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었듯이 이들에게도 사업에 필요한 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이들이 하루빨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따듯한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또는 우리의 곁에서 한국인으로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열어주시옵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뜨거워진 눈을 뜨고 새로운 마음으로 서로의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Van이 인사의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우리 베트남의 동료들 여러분,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들었지요? 저 또한 무척 힘든 시간을 오래도록 지내왔습니다. 남을 원망하며 실의에 빠져보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까지도 원망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였다. 희망을 안고 한국 땅을 밟았지만 곧 배상일에게 설움과 치욕을 당해야만 했던 고단한 생활들, 배상일의 눈을 찌르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끝에 하우스 안에서 잠을 자다가 가스중독으로 죽다가 살아났던 일, 공장에 와서 밤을 새워가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Anh를 만나 함께 사업가의 꿈을 꾸었던 나날들, 비록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고된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적지 않은 보람을 찾을 것만 같았다. 어찌 이 소중한 기억들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랴!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곧 눈이 있어도 올바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똑바로 듣지 못하는 내 마음의 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앞에 계신 ‘성진원예’ 사장님 두 부부께서 깨우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오늘을 있게 해 주신 김남일 사장님께서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아주 많이요. 하지만 내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베트남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증명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 자리에서 종사자 여러분께 제가 한 가지 약속을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 월급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업에 흑자가 날 경우, 이익금의 10%를 여러분께 성과급으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하면 성과급을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증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우리 건배합시다. 머이(건배)~”


축하의 샴페인이 터졌다. 이어 더욱 큰 박수가 터졌다. 한쪽에서는 아직도 자동으로 작동시켜 놓은 CNC선반이 대약진을 준비하듯 좌, 우를 왕복하며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37. ‘안반정밀’의 사훈


Van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성진원예’ 사장님 두 부부까지 오셔서 눈물 나도록 기쁘고 반가웠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시고, 사업자의 꿈을 꾸게 하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축하하네, 자네 꼭 일어설 줄 난 알았지. 아주 힘차게 말이야.”

“고맙습니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아니셨다면, 이런 거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그날 죽었겠죠. 가스에 중독 되어가지구...”

“아! 그랬었나? 맞아,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는 명도 긴 법이라니깐 그래, 하하”

“자, 모처럼 함께 식사나 하시죠, 요 앞 용정교 가기 전에 식당이 있습니다. 모두 그리 가시죠.”


Van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난 다음, 선반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때 회전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본 후 틈새에 끼어있는 먼지를 닦은 다음 자동으로 돌아가는 선반의 전원스위치를 끄려는 찰라, 벽 쪽에서 철커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공장 안의 전기불이 모두 소등되었다. 작년 장마철에 새 기계가 들어올 때에도 이런 일이 한번 있었는데, 또 그러네? 별일도 다 있군! 하고 생각하고는 분전반이 있는 곳으로 가서 덮개를 열어보니 메인 전원스위치가 내려져있었다. 하지만 손전등을 켜고 퓨즈를 점검했으나 아무런 이상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뭘 잘 못 만졌나? 아마 피곤해서 조작을 잘 못했나보지. 다녀와서 매뉴얼을 다시 봐야겠군.’


피곤한 눈을 한 번 깜짝한 다음, 다시 메인스위치를 올려보았더니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선반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 한 Van은, 선반 스위치를 몇 번 더 켰다 껐다하면서 시험을 해본 다음 문을 닫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식당에 들어서자 일행이 몇 명 되지는 않았지만 식당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탓에 방이 꽉 차는 것 같았다. 뺑 둘러앉아 오랜만에 삼겹살과 맥주를 시켰다. 김남일 사장이 들고 있던 액자를 하나 꺼내어 펼쳐보였다.


“이게 뭔지 아나? ‘안반정밀’의 사훈일세. Anh한테, 아니 참 Anh 사장한테 들었지, 사훈을 정했다며? 그래서 액자에 담아왔네. 내가 직접 썼거든. 1. 안전이 먼저다. 2.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자. 로... 그리고 일 시작하기 전에 보험 먼저 들기로 한 것은 잘 한 거야. ‘협성정공’은 각종보험을 다 들었지만 ‘안반정밀’에는 해당되지 않거든.”

“감사합니다.”

“나도 한 때는 좌절을 겪었다네, 누구나 대부분 그런 일은 있는가봐. 15년 전에 부도가 나서 거지가 되었다네. 자살을 하려고해도 당시 아기가 어려서 죽지를 못했어. 살아가자니 너무나 힘에 겨웠지. 한국에서 대학 나오고 공장에서 쇠 깎는다고 하면 얼마나 비웃는지 아나?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했어. 지금은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났잖아? 자네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절망은 디디고 일어설 땅이 되어야 해. 희망을 가지고 디딜 땅이어야지 결코 파묻힐 무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이야기를 듣던 Van과 Anh이 멀리서 지나가는 소방차의 경보음에 맞추기라도 하듯 동시에 대답을 하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한편, 최종적으로 Van이 문을 닫고 나간 공장 안에서는 북쪽 문 부근에서 조그마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공장 안의 선반 연결 전선은 모타가 30마력으로 커진 관계로 과부하를 이겨내지 못해 열을 받아 뜨거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전원스위치가 떨어질 때쯤 플러그와 콘센트의 접속불량, 벗겨진 전선과 바닥의 축축한 습기로 인한 누전 등으로 스파크가 일었던 것이다. 이 불꽃은 옆의 조립식샌드위치패널 벽 내부 스티로폼에 옮겨 붙어 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은 다시 전선을 태우며 선반 쪽으로 옮겨갔다. 기계와 바닥에 흘려진 기름에도 불이 붙어 옆에 놓여있는 오일 통까지 데우기 시작하였다. 몇 분이 지나고 내부온도상승으로 더 이상 열을 견딜 수 없게 된 오일 통이 크게 폭발하였다.


“펑!”


근처 유리창이 박살나버렸고 출입문도 반쯤 열렸다. 폭발한 기름과 불꽃은 스티로폼을 더욱 빨리 태우며 여기저기 거침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쌓아 놓은 플라스틱 재료에도 불꽃이 옮겨 붙었다. 드디어 Flash over! 맹렬하게 솟는 불꽃과 함께 검은 연기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뿜어져나갔다. 이때 지나가던 한 행인이 다가와 보고는 깜짝 놀란 나머지 즉시 전화를 걸어 119에 신고를 하였다.

그러나 이를 까맣게 모르고 식사와 반주를 들고 있던 일행들은 어디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방차 소리에 대하여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남일 사장은 맥주 한 잔을 들이키더니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앞으로도 수없이 어려움이 많을 거야. 사업이란 게 그리 쉽지가 않아. 그리고 신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꼭 잊지 말게, 절대루... 돈은 잃어도 노력하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신용은 한 번 잃으면 영영 끝이야. 현실적으로 아직까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땅에 와서 신용을 쌓았다고 보기 힘들어. 자네가 선구자의 심정으로 열심히 신용을 쌓아 가게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동안 소방차의 경보음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문밖의 눈보라도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식당의 홀과 주방에 있던 종사자들이 밖을 내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어디 불났나? 저것 봐. 연기가 치솟고 있어.”


이때 국남이의 용변 때문에 함께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던 Mai가 근처에서 하늘로 치솟는 검은 연기를 발견하였다. 메케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조금 놀란 목소리로 Van을 불렀다.


“Van! 이리 나와 봐. 저쪽에 불났어. 빨랑. 공장 쪽이야.”

“엉? 불이라구? 무슨 소리야?”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사람들은 머리칼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방문 앞에 앉아있던 Anh이 먼저 뛰어나가고 뒤이어 Van과 나머지 일행도 혹시? 하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곳에서는 다른 건물에 가려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지는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희고 검은 연기가 붉은 불꽃과 함께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고 있었다. 오른쪽의 먼 길에서는 위급함을 알리는 커다란 소방차와 구급차가 각각 한 대씩 달려오고 있었다.


“아차, 새로 설치한 쪽에는 아직 소화전도 없는데.... 있어 봐야 늦었지만 제발, 제발....”


김남일 사장이 불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38. 선반, 저 선반을!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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