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제4부. 베트남 타운
34. 이슬이 아빠니까요.
Ly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자신이 병상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팔에는 링거주사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낯익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남편 배형근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왜 그토록 원수처럼 싸워왔던 남편이 자기의 손을 잡고 앉아 있을까?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일어나려는데 남편이 말렸다.
“좀 더 누워있어. 정신이 들어?”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도 생각 많이 했어. 아기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살아. 응?”
그러고 보니 이제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남편이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 뒤에 서 있는 Anh이 이슬이를 사랑스럽게 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 옆에서는 사장님이 미소를 띠며 감격스럽게도 축하의 박수를 쳐 주고 있었다.
남편은 아기를 받아 다시 Ly에게 안겨주었다. Ly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왈칵 아기를 끌어안으며 통곡에 가까운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슬아~! 이젠 헤어저서는 안 돼, 엉 엉~”
얼마나 울었을까? 응급실엔 다른 환자들이 꽉 차 있었음에도 간호원들은 사연을 알고 있는 듯 조금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기는 아직까지도 어색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Ly는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남편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 주었다.
“고마워요, 여보. 아기 잘 키울께요. 어머님께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꼭 좀 전해주세요, 정말 감사하다구요. 당신도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래요. 아기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아니 자주 오셔야 해요, 이슬이 아빠니까요.”
이제 몸은 다 나은 것처럼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아기를 앉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남편과 Anh이 좀 더 누워있으라고 말렸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과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오는 도중에 이슬이를 데리고 마트에 들려 장난감도 사 주었다. 사장님께서는 우유를 비롯한 아기의 생필품도 사 주셨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오로지 이슬이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소비하였다.
이렇게 3일을 지나니 이제 이슬이와 한껏 친해졌다. 잠을 잘 때에도 옛날처럼 엄마의 젖을 만지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쁜 마음은 점차 진정이 되고, 대신 하나 둘씩 걱정의 그림자가 Ly의 머릿속으로 스며들기 시작 하였다.
언제까지 아기와 하루 종일 있을 수많은 없었다. 직장을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Ly의 마음은 또 다시 무거워지고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져갔다. Anh이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생겼어?”
그러나 Anh은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말 같았다.
“직장문제지, 뭐.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소리를 옆에서 Van이 들었다. 물론 Van도 오늘 안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Ly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말을 안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Van은 생각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거야. 한국 생활, 정말 힘이 드는군!’
Van은 바람을 쏘일 겸 용정교로 나갔다.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자기의 일이 아니므로 모른 척 하면 그만이겠지만, 처음 소송을 제기했을 당시부터 다 알고 있었던 일인데 이제 와서 모른 체 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이때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Anh이 궁금한 나머지 전화를 건 것이었다. 다시 전화를 끊고 만지작거리는데,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바로 Mai에게서 온 것이었다. 순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희망적인 생각!
“맞아! 오, 용신(龍神)이여! 나의 친구 Ly를 도와주소서! 정의가 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Van은 다음 날 Mai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베트남 여자 안 써? 젊은 여잔데 아기 하나 있어. 그래서 먹고 자고 해야 되거든.”
“어, 그래? 몇 살이야?”
“스물네 살. 성실하고 생활력이 무척 강한사람이야.”
“한국말은 어느 정도 해?”
“아주 잘은 못해도 꽤 하는 편이야, 이혼재판도 혼자 받았으니깐.”
“이혼녀구나. 주방일도 할 수 있어? 요즘 손님이 많아서 일이 많거든....”
“그래 주방부터 시작하면 되지. 처음엔 월급을 조금 적게 줘도 될 거야. 말 잘 하게 되면 올려주지 뭐. 한 번 만나볼래?”
“데리고 와 봐. 지금 한 명 구하는 중인데, 한 번 만나보고....”
다음날 Ly는 Mai의 해장국집으로 달려갔다. Mai도 마음에 들어 했다. 아기도 엄마 품에 안기며 방끗방끗 웃었다. Ly는 공장을 그만두고 해장국집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Ly를 보낸 Van과 Anh도 날로 번창해가는 Mai처럼 하루빨리 자신들의 사업을 시작하여야 하겠다며 손을 맞잡고 다시 한 번 굳세게 다짐을 하였다.
제5부. 아! 용신(龍神)이여
35. 역사를 바꾸는 모험
Van은 생각하였다. 이 작은 나라 한국.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자신의 조국 베트남보다도 더 심각한 전쟁의 잿더미였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베트남은 전쟁을 겪었어도 잿더미는 아니었다. 논에는 벼가 있었고 산에는 정글과 열매가 있었으며 광산엔 갖가지 광물과 석유가 있었지만, 이 나라는 그것조차도 없이 어떻게 굶어 죽느냐하는 문제만 남았던 가난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느 날,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베트남인들이 돈을 벌려고 경제대국이 된 이 나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바와 같이 베트남도 메콩 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Van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강에 기적은 없었어. 거짓말이었지. 따라서 메콩강에도 기적은 결코 없을 거야. 여기나 거기나 오직 도전정신의 모험과 용기, 그리고 땀이 있을 뿐이야.’
오전 일과를 끝내고 모두 점심식사를 기다리자 그 틈을 이용하여 Van이 한국 신문을 읽어 다른 베트남 직원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Anh은 Van이 작성해놓은 사업계획서를 긴장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1. 20마력 CNC선반 1대 5천만 원
2. 2마력짜리 밀링 2대 1천만 원
3. 기타 시설자금 1천5백만 원.
그러니까 추가로 구입할 기계구입 및 시설비가 모두 총 7천오백만 원....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모아 준비한 총 자금이 8천5백만 원이니까 운영자금은 1천만 원뿐이란 얘기야?”
Anh이 중얼거리자 Van이 듣고 대답하였다.
“맞아, 운영자금 천만 원이면 좀 부족하긴 하지만 당분간 이익금을 가져가지 않고 잉여금으로 쌓아두면 자금부족문제는 없을 것 같아. 기계는 모래 들어올 예정이구.”
“그럼 기계가 설치되는 모래를 개업식 예정날짜로 해야겠군. 그 다음날 하루는 공장업무를 휴무하기로 하지. 산재보험과 새로이 들여온 기계, 재료에 대한 화재보험을 가입해야 하거든.”
“좋아, 새로운 기계에 대하여 손에 익숙하도록 실습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럼 실제적인 창업의 시작은 개업식 이틀 후가 되겠군.”
다음날 Anh은 오전 일을 마치고 식사를 끝내자마자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며칠 전 PR을 다녀온 ‘(주)KH’라는 중견부품업체에 다시 찾아갔다. 그 회사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부품의 샘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안반정밀’의 Anh입니다.”
“또 왔군요. 샘플은 만들어 오셨나요?”
“네, 가져왔습니다.”
“그럼 상무님께 올라가서 설명을 부탁합니다. 거래처를 변경하는 것은 상무님의 결재가 필요하거든요.”
“알겠습니다.”
Anh은 박명석 과장과 함께 상무실에 들어갔다.
“인사드립니다. ‘안반정밀’의 Anh입니다.”
“네, 말씀 들었습니다. 꽤 끈질기고 자신만만하다구요?”
“우리 공장은 베트남 사람들로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베트남 사람들의 명예를 걸고 성실하게 가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도 손재주가 좋지만, 베트남 사람들도 꽤 좋거든요.”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자신 있다고 생각합니까?”
“상무님께서는 혹시 베트남의 아오자이나 논(Non)을 보셨는지요?”
“봤지요.”
“아오자이는 모두 맞춤복입니다. 또 논은 야자수로 만들지만 한국의 밀짚모자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재미있군요. 그렇다면, 자본금은 어느 정도 되는 업체인가요?”
Anh은 당황했으나 곧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답하였다.
“자본금은 8천5백만 원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반정밀’은 ‘협성정공’의 협력공장으로서 별도의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 아주 소자본 공장이군요. 가내공업 같은...”
“속담에는 ‘가장 작은 나라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은 매우 작은 나라인데 지금은 경제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오, 매우 설득력 있는 사고를 가지고 있군요. 하긴 우리 회사도 40년여 전에는 가내공업수준이었으니깐 뭐.... 그렇다면 또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샘플을 하나 가공해왔다고 들었습니다. 기존 사용제품과 무엇이 다른가요?”
“여기 기존제품 A와 제가 가공해 온 B가 있습니다. 물론 A도 무척 가공이 잘 되어 있습니다. 4면의 각진 부분이 모두 부드럽게 처리되어 신경을 꽤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보시면, 3면이 모두 만나는 꼭짓점이 있습니다. 이 부품은 아이들도 만질 수가 있기 때문이 그것이 설사 플라스틱이라 하더라도 손에 긁힐 우려가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 부분까지 부드럽게 처리했군요.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그럼 며칠 후 우리 박 과장과 상의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nh은 속으로 너무 기뻤다. 3개월 동안 13곳을 다니며 PR활동을 해온지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낸 것이었다. 며칠 후 ‘(주)KH’의 박 과장이 공장을 찾아왔다.
“이번에 새로 개발되는 부품인데, 이 도면대로 만들어 보시지요. 재료는 여기 있습니다.”
제품사양은 50cm x 60cm x 4cm 크기를 200조각으로 잘라 각각에다가 0.5cm의 열십자(+) 홈을 파고 나사구멍을 4부분에 뚫는 것이었다. 옆에 서 있던 Van이 기계 있는 곳으로 가져가 밀링과 드릴링을 이용하여 샘플을 만들어 오자 상담이 계속되었다.
“도면대로 잘 되었습니다. 그대로 만들면 되겠습니다. 총 수량은 원판이 60장입니다. 따라서 총 12,000개인데, 재료가 고가이다 보니 여분을 3장밖에 못 드립니다. 총 63장을 가져오겠습니다. 파(破)가 나지 않으면 모두 해주시기 바랍니다. 견적 부탁드립니다.”
“공급가액으로 60 x 200 x 600 = 7,200,000원입니다. 현금 결제 조건으로 하고, 재료 및 완성품의 운반 및 상, 하차는 주문자 부담입니다. 포장은 안하지만 box를 가져오시면 담아드리겠습니다. 만족하십니까?”
“그 정도면 됐습니다. 납기는 며칠이면 될까요?”
“급하지 않으시다면 10일만 주세요. 하던 작업이 조금 남았고, 기계가 내일 들어오면 3일 후부터 작업 들어갑니다.”
“ok! 내일 오후에 재료 가져오겠습니다. 차질 없이 부탁드립니다. 첫 계약이 만족스럽게 끝나면 계속 거래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박 과장이 돌아가자, Van이 Anh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환호성을 올렸다. 4일이면 끝낼 수 있지만, 5일까지 소요된다 해도 경비를 제하고도 최소한 400만 원 이상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 400만원이라니, 그러고 보니 신기할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고 의외로 모든 것이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Van, 이제 내일 오후에 기계하고 재료가 들어올 테니까, 내일은 오전만 근무하고 오후에 조촐하게나마 개업식을 준비하자. 기계설치가 끝나면 다음날 보험회사직원이 방문하기로 했으니까.”
36. 개업식의 기도와 함박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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