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제4부. 베트남 타운
32. 돈 바구니에 춤추는 보살
‘이슬’이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더니 옷장으로 걸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는 이것저것 고르더니 생일 때 엄마가 만들어준 하얀색 아오자이를 입고 머리에는 논(Non, 야자수로 만든 삼각형 모자)을 썼다.
다시 거실로 나오더니 앨범을 꺼내 바닥에 놓고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알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멀리서 보니 앨범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만지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예리한 카터 칼로 엄마의 사진을 갈기갈기 찢는 것이었다. Ly는 깜짝 놀라 앨범을 빼앗아버리자, 이번에는 아오자이와 논을 벗어들고 다시 칼로 찢기 시작하였다.
“안 돼!”
Ly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이슬이의 몸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이슬이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며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Ly는 따라가며 엄마에게 돌아오라고 목이 매여 불러보았지만 이슬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 달아나는 이슬이를 쫒아가다 보니 강이 나왔다. 이슬이는 강물로 걸어 들어갔다.
“안 돼! 위험해!”
Ly는 죽을힘을 다해 소리치며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더 이상 쫒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슬이는 강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땅을 치고 울며불며 이슬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 후에 고개를 들어보니 강 건너 둑으로 이슬이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앞에는 남편 배형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슬아, 엄마는 여기 있어, 가지마! 제발... 엉 엉~”
Ly는 다급한 나머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강물로 텀벙 뛰어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얼굴을 덮치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에는 잠꼬대하던 팔에 물그릇이 걸려 엎어지고, 동시에 그 물은 얼굴로 튀어버린 것이었다. 매트리스와 옷도 흠뻑 젖어있었다.
“아! 악몽이었어. 혹시 이슬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Ly는 걱정 되었다. 그러나 어디 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안다 하더라도 만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만 있자니 기운은 점점 빠져가고 있었다. 벌서 공장에 못 나간지도 열흘이 넘었다.
Ly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아찔했다. 대충 옷을 주워 입고는 용정교 다리 앞 슈퍼마켓으로 갔다.
“사장님, 여기 점 보는데 어디 있어요?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보살 말이지?”
“아! 네 맞아요, 보살...”
“이 개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보살표시가 있어요. 그 골목으로 들어가 봐.”
“네, 감사합니다.”
가르쳐준 대로 찾아 들어가니 허름한 집 마당의 줄에 요란하게 색종이를 붙여놓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안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고, 나이가 꽤 든 낯익은 아주머니 한 분이 부처 비슷한 모형을 뒤로하고 좌정하여 앉아 있었다. 슈퍼마켓에 들렀을 때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그 여자였다.
“여기 점 볼 수 있나요?”
그러나 말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주머니, 여기 점 볼 수 없어요?”
“왔으면 앉아야지!”
막대기로 옆의 바구니를 한 대 두드렸다. 깜짝 놀라 바구니를 보니 10,000원짜리 지폐가 들어 있었고 아주머니의 손가락은 3을 표시하고 있었다. Ly는 눈치 빠르게 30,000원을 바구니에 넣고 아주머니 앞에 앉았다.
“제가요, 재판을 했는데 아기를...”
“어허! 시끄러워, 참고 기다려!”
이야기는 들으려하지도 않고 염주 알을 굴리면서 중얼중얼 거렸다.
“나라 앗 말씀이 베트남과 달라...~
이리 갈 가 저리 갈 가~, 아무리 봐도 갈 곳이 없구나. 쯧쯧쯧쯧.. 어쩌다 그렇게 되었노? 한국 온지 2,3년 되지?”
“네.”
“안 봐도 알아. 죽지는 않았어. 아들이여 딸이여?”
“딸이예요, 딸.”
“애기 하나밖에 없네?”
“네, 네? 어떻게 알았어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보살님은 다 알고 있는 듯 말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보살이란 사람은 슈퍼마켓에 틈 날 때마다 놀러 다니면서 오고가는 몇 안 되는 마을사람들의 사정을 오랜 기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여자가 방정맞게는... 보살이 뉘 집 애 이름이여?
중얼중얼... 어쩌구...
얼굴을 대해도 마음은 천리라, 콱! 막혀부렀구먼....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나니~. 에구구.. 이를 어쩌노. 쯧쯧쯧쯧...”
가슴이 철렁하였다. 혼자 중얼거리기는 해도 절망에 가까운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3을 가리켰다. Ly는 재빨리 30,000원을 바구니에 넣자, 막대기로 바구니를 한 번 더 힘껏 두드리고는 부드럽게 한마디 하였다.
“동풍해동(東風解凍) 고목봉춘(枯木逢春)이라, 동풍에 얼음 풀리고 마른 나무가 봄 을 만났으니 이제야 돌아오누나. 얼씨구~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오니 마음이 편안한데, 명월중천(明月中天)하니 천지가 밝고 명랑하렷다. 옳거니! 마치 새 봄이 돌아와 온갖 초목이 회생함과 같다하더라.
아하, 자~알 됐어, 이제 가 봐.”
“네?”
“푸른 파도에 물귀신 붙어, 날 생선을 조심하렸다.
가서 기다려 봐. 방정맞게 떠들지 말고 입 조심혀. 재수 날아갈라...”
“네, 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대체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지만, 하여튼 기분은 왠지 좋았다. 재판을 받고 나온 이후 처음으로 희망의 소식을 듣는 듯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Ly는 배가 고파 우선 밥부터 차려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다시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작업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나올 것만 같았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Anh이 물었다.
“아니, 그냥 요즘 식욕이 좋아졌어.”
말을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고 법원에서 판결문이 도착하였다. 조심스럽게 뜯어 읽어보는데, 너무나 기쁜 소식에 그만 기절해버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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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결
사건 20xx 드단 27318번 이혼청구등 사건
원고 호 티 리(Ho Thi Ly)
피고 배형근,
소송대리인 변호사 김영철
주문 1. 원, 피고는 이혼한다.
2. 자녀 배이슬의 친권행사자로 원고(Ho Thi Ly)를 지정한다.
3.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일금일천사백만원과 매월 양육비조로 금50만원씩 지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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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 3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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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풍양속에 대하여
결혼 이후에도 남자친구와 전화를 함에 있어 그 내용이 안부전화 정도의 사사로운 것이라면, 이를 두고 미풍양속에 해가된다고 볼 수 없고, 국제결혼에 있어 양측의 풍속과 전통적인 관습은 존중되어야 한다.
5. 국적과 친권행사(양육권 등)에 대하여
설령, 아기와 어머니가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양성평등의 원칙에 따라 친권행사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
6. 언어, 폭력과 친권행사에 대하여
외국인에 대한 언어 능력이 국적취득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있으나,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친권의 행사를 제한하는 조건은 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모친의 언어가 자녀의 친권행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이에 비하여 폭력적 성격은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친권행사를 제한할 이유가 될 수 있다.
7. 결론.
이상 항소는 이유 있으므로 원심을 파기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김영숙
판사 박XK
판사 유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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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라져버린 딸
남편 배형근은 즉시 상고했다. 그러나 판결은 뒤집어지지 않았고, 이 사건 판결은 확정되었다.
이제 Ly는 꿈에 그리던 아기 ‘이슬’이를 만나는 일만 남았다. 생각해보니 지난날들이 모두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아기가 자기 앞에서 재롱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새록새록 잠자는 모습도 상상에 의해 머릿속에다 그려보았다. 정말 꿈에서 보았듯이 하얀 색의 아오자이를 만들어 입히면 어떨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키가 많이 자랐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이 얼마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세월이었단 말인가? 용정교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를 때면, 사장님에게 한층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는 보살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마치 보살이 재판에서 이기도록 빌어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만나는 날짜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축하의 인사를 하는 듯 멧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참으로 활기차고 희망에 넘치는 아침이었다. Ly도 새들에게 두 손을 높이 흔들어 답을 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공장의 문도 닫았다. 사장님께서 경사가 있는 날이라 미리 휴일로 정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과 Anh도 함께 동행하여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사장님이 핸들을 잡은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88올림픽 대로를 타고 달렸다. 서울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다시 웅장한 올림픽 대교를 건너 워커힐 쪽을 향하였다. 요트가 떠다니는 모습의 한강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하늘엔 구름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하늘도 나를 돕는 거야. 구름이 한 점 없을 수가 있겠어? 오늘은 정말 축복 받은 날이야.”
차도 주변의 화단에는 누가 가꾸었는지 각양각색의 고운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나 축복의 분위기를 더하였다. Ly는 드디어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높이 소리쳤다.
“이슬아! 사랑하는 나의 아기 이슬아~! 이슬이 엄마가 여기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워커힐 산장 길을 돌고 돌아 컨벤션센터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는 1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국제행사가 있는 날인지, 가슴에 이름표와 리본을 단 각국의 외국인들이 예쁜 유니폼을 입고 연신 미소를 보내는 안내원 아가씨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놀라운 시설, 화려한 장식들... 정말 오늘 같은 축복의 날에 꼭 맞는 시설이라니깐. 모두 나와 우리 아기를 환영하는 거라구.”
Ly의 얼굴에는 행복에 겨운 눈물이 쉴 틈을 주지 않고 흘러내렸다. 화장은 이미 다 지워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약속시간 10분전, 아! 드디어 남편의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맨 앞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걸어오고 그 뒤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이슬이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티 없이 맑은 저 모습, 아! 저 아기가 정말 내 딸이란 말인가? 정녕코 꿈은 아니겠지. 천사보다도, 백설공주보다도 천배 만 배는 더 예쁜 저 모습, Ly는 아기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이... 이슬아~”
그러나 이슬이는 불러도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예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오는 저 젊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래, 시간이 많이 흘렀지. 아기들은 금방 잊어버리잖아? 맞아, 이해한다, 나의 딸 이슬아.’
하지만 점점 다가올수록 쏟아지는 행복의 눈물은 폭포수가 되어 서러운 눈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자리에 앉은 아기는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마음대로 안아올 수가 없어 너무나 속이 상했다.
‘불과 몇 달 동안에 저토록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험상궂게 굳어져 있었다. 침묵이 억만년 묵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금까지는 원수같이 싸웠지만 이젠 더 이상 원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기는 건네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하는 수 없이 Ly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잘 키울게요. 이슬아, 엄마야. 이리와. 응?”
그러나 이슬이는 낯선 사람 바라보듯 이상한 눈으로 엄마 Ly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Ly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안아보고 싶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다시 한 번 시어머니께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잘못한 거 있으면 용서해주세요. 아기 잘 키우겠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시어머니께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막상 시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하마터면 Ly는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사랑하는 딸 ‘이슬’이는 이곳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귀한 자식이야. 이사 가거나 전화번호 바뀌면 알려야 해. 자, ‘수영’아. 인사하고 엄마한테 가렴.”
Ly는 다시 한 번 귀를 의심하였다. 세상에! 사랑하는 우리 아기 ‘이슬’이를 보고 ‘수영’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요망스러운 장난이란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목을 축이려 물 컵을 잡는데도 손이 떨려서 그만 컵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엄마를 만나주지도 못하게 하더니, 아예 이름까지 바꿔버리다니...
게다가 이번에는 옆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며 말하는 아기의 음성에, Ly는 그만 심장이 콱! 멎고 말았다.
“엄~마!”
순간, Ly는 온 몸에 기운이 빠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탁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34. 이슬이 아빠니까요.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