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를로르,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오래전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유행처럼 읽혔던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우리 집 책장 한 구석에 머물던 이 책을 골라든 것은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새벽이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와 책장을 바라보는데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다소 빤하고 심심해서 이 책이 유행할 당시에는 나에게 그다지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나에게 꾸뻬의 행복론이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궁금했다.
꾸뻬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친구도 만나고, 절에 가서 스님도 만나고,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에 대한 정의를 하나씩 만들어 간다.
그중 마음에 드는 몇 문장,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행복은 미래에만 있지 않다.
역시나 당연하고 지루한 정의들이지만, 곱씹을수록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지금 당장의 행복을 쉽게 잊곤 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작금의 행복에는 다소 야박하고, 계속 미뤄두고 있는 건 아닐까. 나 역시 시간관리에 실패한 날에 자책감에 휩싸이곤 하는데, 오히려 편안하게 놀고 쉬면서 보낸 시간 속에서 느꼈던 작은 행복에 대해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지금 행복하면 안 될 것처럼 자신을 몰아세우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본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다.
그리고 행복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겠다. 나의 경우, 무언가에 집중한 뒤에 오는 뿌듯함이 주는 행복이 크다. 다만 집중의 시간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들이 있다. 스마트폰 멀리하기, 자투리 시간 잘 쓰기.. 등등. 따라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그러한 노력을 해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쓸모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한 감정은, 사실 어릴 땐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하는 나 자신이 좀 더 씩씩해지고 주체적이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 이런 감정 자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너 참 잘한다' '너는 쓸모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 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태도 아닐까 싶다.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진부한 질문을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 던져보았다. 행복의 종류를 '나'를 기준으로 나눈다면, 이렇게 구분하고 싶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내가 만들고자 노력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달성할지는 미지수인 것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앞으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쏟는 마음을 조금씩 줄여보려 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건 타인의 감정, 과거에 일어난 일과 후회, 질병, 사고, 노화.. 이런 것들이 있겠다.
또한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의 경우 '내가 노력할 수 있지만, 달성 미지수'인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아이가 만약 공부를 잘한다면 부모로서 무척 행복하고 뿌듯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잘한다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닌가? 최근 아들이 엄마와의 학습지 시간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똘똘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놀 궁리만 하는 모습을 볼 때 괜스레 불안해지고 속상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아들이 '잘' 하기를 바랐고, 아들이 잘한다면 그게 내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건 내가 옆에서 가능한 노력과 지원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보았다. 기준을 바꿨다.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오늘은 작지만 이러이러한 것을 배웠다, 실수를 많이 했어도 꾹 참고 끝까지 학습지를 풀었다, 학교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조금 더 씩씩해졌다..' 이렇게 내가 만들 수 있는 유형으로 행복의 기준을 바꾸고 아들을 응원해 주기로 했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