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났다. 코로나 19 팬더믹 상황으로 대면보다 비대면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이에 영상통화로 가족들끼리 안부를 묻고 자식들이 부모님께 차례로 찾아가 뵙는 집이 많았다.
“살다 살다 이런 설은…….”
팔순이 넘은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진짜? 아닐 텐데.”
엄마는 곰곰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태어나셔서 귀국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곧 전쟁을 겪었으니 온갖 형태의 설을 다 겪은 셈이었다. 그러나 신산했던 설은 다 잊고, 평온했던 시절의 설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내게 설과 추석 등 명절은 늘 분주한 때였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제사와 차례가 빈번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일찍 돌아가신 큰아버지 대신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큰집 가족들은 큰어머니부터 아들들까지 모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제사와 차례는 우리 집으로 넘어왔다. 그 많은 일들이 모두 엄마 차지였다.
경북 출생인 아빠는 부엌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당연히 아들들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신 뒤에도 엄마는 음식들을 장만하느라 발을 동동거렸다. 때로는 이모가 와서 거들고, 때로는 일하는 사람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상 위에 올라가는 음식들이 참 궁금했다.
고기 산적은 짰고, 삶아서 통으로 올라가는 문어는 질겼고, 목뼈부터 고스란히 통으로 찐 닭은 오래 익혀도 잘 안 익었고, 커다란 생선도 맛이 밍밍했다. 나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간이 약하게 느껴졌는데 마늘과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대체로 짜고, 대체로 질기고, 대체로 맛이 밍밍한 음식들은 대부분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했다.
“왜 안 들어가는데?”
“귀신들이 싫어하거든.”
“귀신이 와?”
“돌아가신 조상들이 오셔서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가시거든. 그런데 싫어하는 게 있으면 안 오셔.”
나는 이 맛없는 음식들을 먹으러 오는 조상들이 안타까웠다. 조상들은 매콤한 김치 한 조각 먹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안타까웠다.
문제는 차례가 끝난 다음에 이 음식들의 처치였다.
슴슴한 나물들은 다시 마늘을 넣어서 볶았고, 통으로 올리느라 잘 안 익었던 닭은 해체해서 다시 쪘고, 생선도 반으로 갈라서 다시 구웠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차례나 제사가 지난 다음에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전, 깎은 밤, 대추, 떡, 과일, 밥, 국 정도였다.
도대체 왜 맛이 이럴까?
무슨 까닭일까?
이 의문을 해결한 것은 궁중음식을 배울 때였다.
현재 우리가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들은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먹던 음식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마늘은 아마도 향 때문에 빠진 것 같지만, 고춧가루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것이니 설득력이 꽤 있다.
그러니까 간장이나 소금 간이 된 음식들을 주로 먹다가, 거기에 매운 맛과 단 맛이 추가되는 형태로 음식이 달라진 것이다. 예전에는 많이 쓰지 않던 기름이 요즘에는 흔한 식재료가 되면서 튀김이 늘어났다고 볼 때, 제사상과 차례상에 튀김이 없는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근대에 들어오면서 ‘옥춘당’이 추가된다. 알록달록한 색소가 들어간 수레바퀴처럼 납작하게 눌린 사탕이 상에 올라가는데, 조청을 고아서 만든 ‘엿’을 단맛의 기본으로 쓰던 우리에겐 없던 음식이었다.
지금은 별로 맛이 없는 음식이라고 여겨지겠지만, 아주 예전 선조들 입장에서는 가장 귀한 음식들을 모아서 정성을 다해 차린 상이다. 달걀을 하나둘씩 모으고, 일 년 동안 깨 농사를 지어 짠 들기름으로 전을 조금 부치고, 생선을 손질해 올리는 등 최선을 다해 차린 상이었으리라.
아주 오래 전, 조상에게 바치기 위해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던 누군가의 손길과 예가 끝나고 나면 그 정성을 함께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사람들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하게나마 한 접시에 골고루 담아 이웃에게 나누던 마음까지도 돌이켜 볼 수 있겠지.
다음 설, 다음 추석 때는 웃으면서 다들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