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이 오고

by 김하은

나는 봄에 태어났지만 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10대에는 춘곤증 때문에, 20대에는 비염 때문에, 30대에는 짧게 오는 봄이 달갑지 않았다. 알록달록하고 예쁜 봄옷을 사면 한 번 혹은 두 번 입으면 곧 더워져서 못 입곤 했다.

40대가 지나서야 봄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이 비염도 많이 나아졌고,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봄은, 4월은 따뜻하고 화사하고 예쁜 계절이 아니라 아프고 쓰라린 계절이고 시간이다.


2016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그 배에 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가족들도 있고, 여행을 가던 사람들도 있고, 승무원도 있고, 아르바이트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옆으로 기울어서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탈출하라는 신호는 없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챈 승객들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다. 그 광경을, 끔찍한 그 순간을 모든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지켜보았다.

아직 희망이 있을 때, 생존자들이 있으리라 믿었을 때, 구할 수 있다고 간절히 바랐을 때, 놀랍게도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아무도.

우리 집에는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의 큰애가 있었다. 같은 경기도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사는 큰애에게도 이 참사는 큰 충격을 안겼다. 큰애의 친구들 중에는 안산에서 살다가 전학 온 아이도 있었고, 외부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희생자들과 만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희생된 선생님들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선후배였다.

“오늘 친구가 웃었는데, 그게 너무 슬펐어. 그동안 아무도 안 웃었거든.”

무려 한 달 동안 교실에서 웃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우리가 무슨 사고를 당한다면,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거야. 사고 현장 밖에서 네 탓이다 하면서 싸우기만 하겠지?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겠지?”

나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

“엄마가 구해줄게.”

“아니, 엄마. 나 구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어떻게 좀 해 봐. 나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제발…….”

둘이서 껴안고 펑펑 울었다. 뉴스에서 보여주는 기울어진 배 말고, 자꾸 가라앉는 우리 말고 다른 걸 보고 싶었다.


그 즈음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한데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희생자들 중에 학생들이 많았다는 건 우리가 그동안 썼던 작품을 읽었던 독자가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뜻이다. 우리가 작품으로 만든 우주에 같이 유영하던 여행자들을 잃었다는 의미다. 우리와 눈길을 맞추었던 생각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사람들과 그림을 그렸다. 노란 종이에 그림과 글을 쓴 건 받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세월호’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러다 또 다른 요구가 작가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뭘 하자고?”

“우리가 글과 그림으로 이 참사를 기록하자고.”

“이걸?”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너무 큰 충격이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참사였다. 단어만 떠올려도 심장이 쿵쿵 뛰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한숨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글을 쓴다고? 말도 안 돼!

그런데 마감이 글을 쓰게 했다. 그 글과 그림들을 프래카드에 인쇄해 광화문 광장에 걸었다. 짧은 기간에 완성한 글들은 거칠고 뾰족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참사를 우리 글로, 그림으로 드러낸 결과가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더 흘렀다. 배는 여전히 가라앉은 채였고, 광화문 광장에는 미사와 예배, 추모 집회가 계속 열렸다.

“이번에는 타일에 작업을 해 볼까?”

나는 이런 일을 벌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일단 반대부터 했다. 일을 벌이면 그 일을 수습할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그 몇 사람에 내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일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시작되었다. 2014년 11월에 시작된 타일 그림은 2015년까지 이어졌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타일 그림들은 2015년 4월,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붙었다.

195m, 4656장의 타일은 각각의 사연을 품고 ‘기억의 벽’을 만들었다.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만든 416의 기억들이었다.


기억의 벽을 만들고 난 뒤에도 진도에 자주 내려갔다. ‘기억의 벽’을 보수하고 손질하기 위해 내려가곤 했는데, 이왕이면 진도민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싶었다. 진도는 희생자들이 처음 올라왔던 곳이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만났다. 살아서 만났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면 가슴 아프고 눈물만 나오고 답답하고 미안해한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진도로 아예 내려갈 엄두를 못 낸다. 자주 내려가다보니 진도는 따듯하고 포근하면서 바람이 변화무쌍한 곳이었다.


‘기억의 벽’을 만들 때 움직였던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이번에는 진도의 옛길을 뚫었다. 예전에는 다녔지만 도로가 생기면서 막혔다는 숲길을 냈다. 톱으로 자르고, 가시덤불을 치웠다. 처음에는 숲길로 들어가기 위해 밧줄을 잡고 올라야 했지만 나중에 진도분들이 층계를 만들어주셨다. 우리가 만든 길 이름이 ‘팽목바람길’이다.


‘팽목바람길’은 방파제를 지나고 숲길을 지나 마사마을로 내려오고 갈대숲길을 지난다. 팽목항 등대가 빤히 보이는 방파제 앞에서, 참사 당시에 유가족들이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고 말하는 어민을 만났다. 마사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이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안타까워하며 마음을 내주신다. 갈대숲길에서는 진도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면서, 다시 내려오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곳에서 진도를, 세월호를, 사람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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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앞두고 글이 막혔다.

7년이나 흘렀는데, 아직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그렇다.

7년이 지났는데 참사의 모든 것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는 잘 버티는 것이다. 이 기막힌 일을 잊지 말고 잘 기억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밝혀낼 수 있다면, 그 시간까지 꾸준히 말해야 한다.

혼자서 엄두가 안 난다면 같이 기억할 동지를 만들어보자. 매달 진도를 걷는 ‘팽목바람길’ 길동무에 슬쩍 끼어도 좋다. 그러면 당신의 참담함이 든든함으로 채워질 것이다.


4.3 항쟁, 4.16 참사, 4월이 무겁다.

그 무거움이 다시 묻는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 당신은 기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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