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두꺼운 패딩을 걸쳤는데, 곧 여름이 다가올 모양이다. 더위가 시작되면 몸에 활력이 떨어지고 의욕도 덩달아 낮아진다. 무엇보다 식욕이 떨어져서 더 힘들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불 옆에서 음식을 하는 건 정말 고역이다. 그런데 이런 여름에도 입맛을 돋우는 음식들이 몇 있다. 열무김치도 그 가운데 하나다.
나는 열무김치를 많이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집안에서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대물림으로 내려오는 것일 때 밥상에 자주 오르는데, 내가 어릴 때 받은 밥상에는 열무김치가 자주 오르지 않았다. 할머니가 같이 살던 우리 집에는 주로 할머니 입에 맞는 음식들이 올랐는데, 거기에 열무김치는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젓갈을 싫어해서 곰삭은 김치나 젓갈류도 잘 먹지 않았다. 젓갈을 좋아하는 엄마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원없이 젓갈을 먹고 들어오곤 했는데, 어릴 때부터 잘 먹지 않아서인지 나도 젓갈에 손을 잘 대지 않는다. 그래도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몇 가지 젓갈은 먹을 수 있지만, 여전히 썩 땡기진 않는다.
반려는 어릴 때부터 젓갈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밥상을 받아왔다. 여름에는 열무김치와 콩국수를 해먹고, 내겐 낯선 젓갈들을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식습관 때문에 처음에는 애먹었지만 싱겁게 먹는 내 입맛과 가끔 짜게 먹는 반려의 입맛이 만나 절충안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 가족이 먹는 밥상이 그 절충안인 셈이다.
그런데 여름이 오면 반려는 열무김치를 먹고 싶어한다. 나는 배추김치와 무 김치, 파김치 외에는 담그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내가 간절히 먹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정말 열무김치를 좋아한다면 어떻게든 담글 텐데 한두 번 먹으면 그걸로 끝이어서 담글 의욕을 별로 품지 않았다.
“열무김치를 담을 때, 우리 엄마가 확독에 양념을 갈았거든.”
“뭐에 뭘 했다고?”
“확독에 양념을 갈았다고. 생고추랑 마늘을 확독에 넣고 갈았어. 그러고는 거기에 양념을 다 넣고 버무려서 절인 채소들을 넣고 무쳤어. 그 맛이 정말 좋았어. 우리 확독 하나 살까?”
반려가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외계어를 듣는 듯했다. 확독이 뭐지? 그게 뭔데 생고추와 마늘을 갈 수 있지? 믹서기 같은 건가? 그런데 거기에 채소를 또 넣었다고?
지역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소통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내겐 확독이 그랬다.
그러다가 확독을 처음 보았다. 내가 본 확독은 김칫독 뚜껑처럼 생겼는데, 안쪽에 돌기가 있었다. 그곳에 재료를 넣고 확돌로 문대면 고추나 마늘이 짓이겨지면서 갈아진다. 믹서로 갈면 형체없이 갈려서 맛이 난다면, 확독으로 갈면 불규칙하게 재료들이 으깨지면서 맛과 향이 조금 더 풍부하게 나고 질감도 살아있다. 그렇게 양념을 만들어서 버무린 김치는 깔끔하면서 맛이 깊었다.
처음에는 욕심이 났다. 저런 확독이 하나 있으면 우리 집 김치 맛이 확 달라지겠구나!
그런데 안쪽에 요철과 돌기를 내서 재료를 파쇄할 수 있게 만들어진 옹기라서, 그걸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은데다 좋은 흙과 유약을 쓴 것으로 구해야 했다. 확독만큼은 제대로 만든 것을 쓰라고, 내게 확독을 보여준 사람이 말했다. 맷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비슷비슷한 맛이 나는 듯하지만 나쁜 돌을 쓰면 그 맛이 재료에 배어든다. 그래서 좋은 확독을 구하려 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열무김치, 그냥 사 먹자.”
“그래.”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반려는 열무김치 순례를 시작했다. 이 집 저 집 반찬가게에서 만든 열무김치를 먹어보는데, 썩 만족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아직 열무김치를 담을 생각이 없다. 나중에 좋은 확독을 사면, 그땐 생각해볼 참이다. 확독에 양념을 쓱쓱 갈면 재미있겠지, 그 생각에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