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텅 빈 방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은 Jun 22. 2022

텅 빈 방

텅 빈 방들을 돌아보기 전

2년 전, 우리 가족은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나려 했다. 첫째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에 스페인 빌바오와 바르셀로나를 자유여행으로 다녀왔는데, 그 기억이 아주 좋았다. 그 전에도 같이 배낭여행을 다녔지만 빠듯한 경비를 아끼기 위해 제대로 못 먹고 다녔기 때문에 늘 배가 고팠다. 화장실을 가려면 돈을 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했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여러 번 배낭여행을 다니는 동안 빌바오와 바르셀로나를 갈 즈음에는 맛있는 걸 사먹었을 수 있었고, 겉에서만 보던 유적지에도 들어갔다. 유아차에 태워서 처음 데리고 나갔던 첫째는 빌바오에서 영어로 표를 살 정도로 컸고, 둘째도 자기 짐을 끌 정도로 컸다. 


다시 그 기억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용 적금을 들었다. 그때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전세계를 덮친 COVID-19 상황이 나날이 심각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상황은 모든 걸 주저앉힐 정도로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항공편은 발이 묶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둘째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혼자 갔고, 입학식도 치르지 못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취소되었고,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받았다. 첫째도 온라인 수업과 온라인 시험을 치뤘고, 졸업식과 졸업 앨범 없이 졸업했다. 졸업장은 등기로 받았다.

사람과 만나는 일이 사라진 일상에서 우리는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유일하게 출근하는 반려를 빼면 우리는 각자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 일을 했다.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는 동안 또 다른 일이 생겼다.   

  

둘째가 아팠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하자면, 아마도 고등학생일 때부터였을 것이다. 심각하게 예민했고, 민감했으며, 살이 계속 빠졌다. 키는 나보다 20cm가 더 큰데, 몸무게는 나보다 덜 나갔다. 그런 상태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사회복무요원으로 등급을 받았다. 그러고도 살이 계속 빠졌다.

“큰 병원에 데려가 봐.”

동생이 심각하게 말했다. 

종합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병명을 알았다. 그 뒤로 한 달에 서너 번씩 진료를 받았고, 차츰 그 간격이 길어졌다.      


먼저 식단을 바꿨다.

평소에 좋아했던 음식들 몇 가지는 식탁에서 아예 뺐다. 어떤 재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아예 음식으로 만들어서 선물하기도 했다.

어떤 음식은 금지당했고, 어떤 음식은 자제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밀가루였다. 식탁에서 밀가루를 빼고 가공식품을 최대한 제외했다. 조금이라도 상황을 좋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던 빵과 시리얼 제품은 모두 식탁에서 사라졌다. 과자도 몇 가지만 가능했고, 초콜릿도 불가능했다.      


소문난 초코보이였던 둘째는 초콜릿과 코코아, 술과 담배 등을 금지당했다. 20대 초반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탈을 모두 저지당한 상태로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챙기는 게 내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접촉을 줄였다. 외부 활동을 줄이고,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에 몰두했다. 어떻게 하면 몇 가지를 제외한 식단에서 풍성한 맛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러는 동안 내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즈음 연이어 힘든 글을 썼던 것도 한몫했다. 감정이 소진되었고 쉽게 지쳤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 사이 둘째는 오미크론을 앓았고, 일주일 동안 안방에 격리되었다가 풀려났다. 2년 동안 애써 찌운 살이 그 일주일 사이에 다 빠졌다. 홀쭉해진 아이를 만났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인생은 나 혼자 애면글면한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생 후반부에 접어 들었지만 여전히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책 한 권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을 꿸 고갱이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 그 시간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얻었다.     

둘째에게 국방부에서 소집통지서가 왔다.

“괜찮겠니?”

그 새 둘째는 상태가 좋아졌다. 약으로 다스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받을 스트레스가 걱정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나는 또 다른 걱정이 앞섰다.

2년 동안 방을 꽉 채우고 있던 아이가 떠나면, 그 텅 빈 방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아이를 더 단단하게 중심이 잡힌 사람으로 맞고 싶었다.   

  

“나, 당신한테 상의할 게 있어.”

“뭔데?”

책을 보던 반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베를린 가자.”

“어딜 가자고?”

“베를린. 2년 전에 가자고 했는데 못 갔잖아. 훈련소 보내고, 돌아올 시간 동안 우리도 떠나자. 정기예금 깨면 갈 수 있어.”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 들었던 적금은 이미 털어서 썼지만, 남은 돈을 모아서 정기예금으로 묶어둔 상태였다.

반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장난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렸다. 

“알았어.”

“그럼 계획은 당신이 짜. 나는 마감 하나 끝내고 도울게.”

그때부터 반려는 여행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내가 장편 청소년 소설 『변사 김도언』을 쓰기 전에 중국 답사를 네 번 갖다 오는 동안, 반려는 바르셀로나를 끝으로 국외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여러 번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러 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첫 여행 때는 첫째가 유아차를 탔으며 둘째는 태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여행 때는 도쿄로 떠났는데, 그때 아이들이 지하철 안내방송을 따라하곤 했다. 세 번째 여행이 북유럽을 낀 40여 일이 넘는 것이었고, 네 번째 여행이 스페인과 바르셀로나 여행이었다. 

가장 긴 여행은 40여 일이었고, 그때 일정과 숙소 및 이동 차편 등도 반려가 미리 예매했다. 온갖 형태의 숙소와 이동 형태를 경험했고, 다른 여행자들이 어떻게 다니는지 듣고 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 저 청년들처럼 큰 배낭을 메고 야간 기차를 타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겠구나 하는 상상을 했다. 

“너희는 늘 세트로 다니잖아.”

오빠는 배낭 여행을 떠나는 우리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다니던 세트에서 아이들이 빠지고 우리 둘만 가는 여행은 신혼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베를린 일정을 어떻게 짜야 할지 고민하면서 유학을 다녀온 사람을 만나 조언을 들었고, 책도 여러 권 읽었다. 베를린만 갈 것인지, 인접한 다른 도시나 국가를 끼고 갈 것인지 고민하다가 폴란드를 골랐다.

두 국가는 2차 대전을 일으킨 나라와 침략을 당한 나라였으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고, 사람들의 희생이 컸던 곳이었다.     

일정을 변경하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마지막으로 결정된 경로는 ‘독일 베를린 – 폴란드 크라쿠프 – 오시비엥침 – 크라쿠프 – 바르샤바’였다.

오시비엥침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방법이 애매해서 크라쿠프를 거치기로 했고, 독일 철도와 폴란드 철도, 비행기 예약 사이트를 뒤졌다.

그리고 쉽게 접근하기 힘든 지하세계까지 예약을 마쳤다.     


그러는 사이에 둘째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고, 가방에 약을 챙겼고, 개봉하지 않았으며 유리병이 아닌 화장품들을 챙겼다. 가방을 반 이상 차지한 약을 보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난 괜찮아요.”

“알아.”

우리는 말뿐인 위로를 했다. 겪어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할 아이 옆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2년동안 내 생활을 꽉 채웠던 아이가 떠난 삶이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다.     

훈련소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온 날, 아이의 텅 빈 방을 바라보며 마음이 더 무거웠다. 내가 걱정할 일은 당분간 멈춰야 한다. 더이상 애면글면하지 않고, 아이가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텅 빈 방을 보러 떠나기로 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삶이 송두리째 빼앗겼던 그들이 느꼈을 텅 빈 방을 보고 싶었다. 글이나 영화로 경험하는 것과 다른 그 방들을 보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싶었다.


“준비됐지?”

“그럼.”

우리 여행을 위해 첫째는 신발을 마련해주었고, 둘째는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튼튼한 연골이 있었다. 더 긴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은 12일이었다. 그동안 볼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보고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째에게 집을 맡긴다고 했다.

“나 혼자 두고 떠나니 좋냐?”

“너 이제 성인이잖아.”

“잘 갔다와라, 췟!”

첫째는 우리에게 반말을 종종 한다.

나비 인형도 손을 봤다.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로 희생된 꽃다운 여성들을 의미하는 ‘나비’는 국외 답사에 처음 따라왔다.

우리는 짐을 쌌다.

둘째가 쓰던 텅 빈 방을 뒤로 하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