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폴란드 일기 12
운터 덴 린덴에 있는 훔볼트 대학교는 베를린에 있는 대학교에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졌다. 프로이센 왕국의 자유주의적인 교육 개혁가이자 언어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가 세웠다. 이곳은 나치가 집권했을 때 나치즘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폐교했고, 소련이 동독을 관리할 때 다시 개교했다. 냉전 시기에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서베를린에서 베를린 자유대학이 개교했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다시 훔볼트 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독일 통일 이후에도 서독과 같은 교육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아인슈타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게오그크 헤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야콥과 빌헬름 그림 형제, 하인리히 하이네, 로베르트 코흐, 막스 베버 등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쳤다.
훔볼트 대학교에는 시민들도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의 중앙관은 이 대학 교수였던 그림형제의 이름을 따서 ‘그림형제 도서관(Jacob-und-Wilhelm-Grimm-Zentrum)이라고 불린다. 시간이 늦어 들어가진 못했지만, 이곳을 이용한 유학생들이 남긴 글에 따르면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방이 따로 있다고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라커에 짐을 넣고 층계를 올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도서관이 근처에 있으면 좋은 점이 많다. 코로나가 극심일 때, 도서관이 문을 닫자 우울증이 나를 덮쳤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르던 내 아지트가 사라졌고,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일었다.
훔볼트 대학교 정문 근처에는 고서와 옛날 사진들, 배지를 파는 상인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가판을 들고 나와 장사를 하고 오후 6시 무렵에 장사를 마친다.
이들이 장사를 하는 이유는 베벨 광장(Bebel Platz)에서 찾을 수 있다. 베벨 광장은 왕립 오페라 극장, 성 헤드비히 대성당, 훔볼트 대학 법학부, 대학 본관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한가운데 바닥에 유리창이 있고, 그 아래 바닥으로 흰 책장이 설치되어 있다. 책장만 있고 책은 꽂혀 있지 않은, ‘빈 도서관’이다.
1933년 5월 10일 밤, 독일대학생총연합과 군중들이 2만 권이 넘는 책들을 불태웠다. 그들은 ‘비독일적인 정신에 반대하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그때 유대인 학자뿐만 아니라 나치를 비판한 사람들이 쓴 책들도 그 불길에 휩싸였다. 이날 베를린뿐만 아니라 본과 드레스덴 등 열 여덟 개 도시에서 분서갱유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 ‘빈 도서관’ 아래 ‘하인리히 하이네’가 쓴 글이 새겨져 있다. 번역하면, “책을 불태우는 자는, 사람도 불태울 것이다.”
비가 와서 흐른 날씨에 빈 책장이 더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 유리창에 내 책 표지를 놓았다. 이곳에 오기로 마음 먹을 때부터 놓고 싶었다. 어떤 것은 표지뿐만 아니라 작은 책처럼 만들기도 했다.
나비와 함께 내 표지를 흩어놓으며 불타는 책을 지켜보았을 작가들을 떠올렸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 사건에 통탄하며 ‘분서’라는 시를 발표했다.
거대한 힘 앞에서 무기력했을,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펜을 들었을, 그들이 품었던 마음을 기억하고 싶었다.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근처에 접어들면 소련군 모자와 미군 모자를 파는 가게들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곳에 이 두 나라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고, 돈을 받아서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현재는 없다. 이곳은 간단하게 ‘Checkpoint C’라고도 불린다. 분단된 베를린에서 경계를 통과하는 검문소 중 하나였고, NATO 음성 문자 표기법에 따라 세 번째 검문소인 C 검문소가 ‘찰리’로 불렸다. 이 표기법에 따르면 첫 번째 A 검문소는 알파, 두 번째는 브라보, 세 번째가 찰리, 네 번째가 델타라고 한다.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의 궁전이라 불렸던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역으로 이동했고, 외국인들은 이 검문소를 이용했다.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커다란 인물 사진이 찍혀 있다. 동독 경계에서 접근하면 미군복을 입은 사람, 서독 경계에서 접근하면 소련군복을 입은 사람이 보인다. 이 군복은 실제 군복이 아니라 비슷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는 장벽을 뜯어서 파는 상점들이 몇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지만, 분단 시절에 체크포인트 찰리는 긴장이 어마어마했다. 한때 탱크가 대치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사거리를 꺾어 도보를 따라 걸어가다 ‘페테 페히터 추모비( Peter Fechter – Monument)’를 만났다. 열 여덟살 소년 페테 페히터는 친구와 함께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넘어가려 했다. 철조망이 있는 2미터 벽을, 친구는 넘어갔고 페테가 뒤따랐다. 그러나 동독 국경 수비대가 쏜 통이 페테의 골반을 맞혔다. 페테는 벽에서 떨어져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동독과 서독의 경계였다. 서베를린 지역에서 경계를 서던 경찰이 그에게 붕대를 던졌으나 그가 있는 곳에 닿지 않았다. 동독 수비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이 광경을 수백 명이 지켜보았다. 결국 한 시간 뒤, 페테는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때 페테는 열 여덟살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서베를린에서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동베를린에서는 누구든 이 벽을 넘어가는 사람에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
추모비에는 페테 페히터의 나이와 이름, 그 문장만 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저 스쳐지나갈 수 있는 붉은 기둥은 과다 출혈로 죽은 청년을 기억하려는 듯 우뚝 서 있다.
나는 그 기둥을 쓸어내렸다.
“이제 평안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