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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시 시작된 순례길

슬슬 풍겨오는 빌런의 기운

by 고군분투 삼십대

다시 걷는 순례길, 약속대로 오전 5시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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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도 큰 도시답게 도보도 잘 조성되어 있고 순례길 안내도 잘 되어 있어 걷기가 수월했다.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2주라는 짧은 소요기간과, 잘 갖춰진 안내와 숙소 덕분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어도 난 같은(처음부터 걷는) 선택을 했을 거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동안 걷기로 단련된 탓일까 빠른 속도로 10km를 걸어내고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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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는 스페인어로 카페 콘 레체! 고소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추위를 날려냈다.


중장비가 가득한 항구를 지나, 본격적인 해안길을 끼고 걷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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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주한 대서양은 파랗다 못해 네이비색이었다. 깊은 푸른색 바다와 하얀 파도가 눈부시게 빛이 났다.

"대서양을 마주하다니, 이 바다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도 금세 다다를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대양을 넘는 이 길 위에서 집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진다.


멋진 풍경을 놓치기 아쉬워 사진을 찍느라 걷는 속도가 느려져 20km 정도의 거리를 5시간이 넘게 걸었다.

점심을 먹으러 Lavra라는 어촌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남은 5km를 걸어 Labruge 마을의 순례자 숙소로 갈 것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답게 한국의 어촌마을과 유사한 느낌이다.

투망과 돌돌 말린 그물들 그리고 생선 구운 냄새가 가득한 식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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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구이와 스테이크, 그리고 맥주를 곁들인 점심을 즐겼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수산시장이 있어 잠시 들렀다.

그런데, 동행이 저녁을 해줄 테니 식재료 값을 전부 부담하라고 한다.

밖에 나가 사 먹는 비용이 대략 10~20유로 정도이고, 식재료 값이 30유로 정도이니..

찝찝했지만 첫날부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식재료 값을 전부 지불했다.


숙소에 들어가선 순례자들이 늘 하는 샤워 - 손빨래 - 빨래 널기 - 휴식의 루틴을 가진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시작된 외국인과의 스몰토크

한국에 와서 서울도 가보고, 수원화성에도 가봤다고 한다.

이름을 들어도 모르는 나라에 사는 외국인도 한국에 관광을 온다니, 내심 뿌듯하다.


외국인이 따뜻한 티를 타준다고 한다. 내 영어 수준으론 스몰토크만 가능한데 걱정이다.

티를 마시며 몇 마디 주고받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어색했던 대화를 마쳤다.

한국에 가면 반드시 영어공부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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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시장에서 사 온 해산물과 기타 식재료로 볶음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곱씹을수록 산술에 안 맞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지만, 얘기하기엔 쪼잔한 느낌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식사를 하며 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본인이 만나본 사람 중 이상한 사람은 다 교회에 다닌다라는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했다.

뭐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대화하는 상대방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데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이 사람 뭐지?, 경계해야 한다."라는 적색경보가 울렸다.


하지만 나도 생경한 환경에서 누군가가 필요했고, 이런 주제로 대화만 안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해 다음날도 같이 걷자는 약속을 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참 많다.

T의 표본이지만 정 많고 누구보다 날 사랑해 주는 우리 남편

언제나 날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가족들

나랑 비슷한 성격의 친구들


그간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의 존재들이 천운의 결정체라는 걸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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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단디 싸고, 내일도 오전 5시 출발!


부디 이 아주머니가 빌런이 아니길, 불길한 기운이 기우이길..! 바라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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