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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순례자라고 모두 좋은 사람은 아냐

썩은 밧줄을 끊어내자.

by 고군분투 삼십대

징징, 울리는 알람 진동을 1초 만에 끄고 서둘러 채비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묵는 알베르게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알람을 끄는 능력이 필요하다.


깜깜한 새벽, 찬 기운이 퍼진 공기 속, 얇은 바람막이를 걸치고 오늘도 길을 떠난다.

오늘은 Apulia라는 마을까지 28km를 걷는 날이다.


그래도, 누군가 곁에 있기 때문일까? 더 이상 걷는 일에 감정적인 괴로움이 줄어든 느낌이다,


지평선 끝에서 해가 떠오르며 보이는 풍경은 역시나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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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가로등이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의 입구를 벗어나자, 하늘은 짙은 파란색에서 살구색, 그다음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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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기 위해 여기에 왔구나."


바다를 벗어나 모래 언덕을 걸으며, 3시간여 만에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도착했다.

오늘의 아침은 카페 콘 레체와 에그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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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아주머니의 이상한 행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의 일은 그냥 해프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노부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순례자들

마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벌써 20km를 걸어냈다.


아주머니와는 중간까지 함께 걷다 헤어졌다.
본인은 잠시 쉬었다 갈 테니 먼저 숙소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신다.
난 가이드도 아니고, 말 그대로 동행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요구할까.
길 찾기, 숙소 예약, 자리를 맡아두기까지.


기우였던 게 아님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한쪽에선 "혼자 걷자"라고 다른 한쪽에선 "그래도 이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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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해 점심으로 간단한 과자를 먹었다.

워낙 과자를 좋아하는 지라 한국에서도 종종 과자로 식사를 때우곤 한다.

더불어 식당에서 계속 밥을 먹기엔 금전적으로도 부담이 크다.


숙소 주인에게 친구가 곧 오니 자리를 줄 수 있냐 물었다.

원래는 안되지만, 오늘은 순례자가 없으니 해주겠다고 하신다.

"에휴… 내가 몸이 힘들어서 그런가? 마음도 조금 좁아진 걸까?"

이렇게 별거 아닌데, 괜히 마음을 좁게 썼나 싶다.


잠시 쉬고 있던 중, 아주머니가 도착하셨다.
가방을 툭 던지더니 "내 방에 가져다 놔"


그 순간, 나를 두르고 있던 친절이란 가면이 쨍그랑 깨졌다.


"이런 건 스스로 하셔야죠."
평소엔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강도가 세질 거다"라는 확신이 들어 내뱉었다.


순례자라고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작은 폭풍을 이젠 끝내야 한다.

이제는 혼자 걷는 불안함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산티아고, 정말 쉽지 않구나.



순례자들의 루틴은 매일 반복된다. 씻고 빨래하고 널고, 저녁을 먹고 내일 먹을 주전부리를 준비하는 일상.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시간은 벌써 20시를 가리킨다.


준비를 마치고 있으니, 밖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어?" 그 소리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새로운 한국인의 등장! 과연, 내 구원투수가 되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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