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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Vila do Castelo까지 24km

by 고군분투 삼십대

어제 늦은 저녁, 한국계 미국인 두 사람이 숙소에 도착했다.

한 명은 캐롤, 또 다른 한명은 스테이시

포르투에서 출발한 그들은 계획 없이 길을 떠났고, 이틀을 걸었지만 겨우 15km를 밟았다고 한다.
내가 아는 선에서 경로와 숙소를 알려줬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내일 아침 다 같이 새벽 5시에 출발하자고 약속을 했다.


새벽, 알람이 울리자 눈을 떴다. 미리 옷을 입고 잠든 상태였기에 세수와 양치만 하고 숙소를 나섰다.


어제는 두 명이었지만, 오늘은 네 명이서 함께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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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롤과 함께 빠르게 걸어 선두 그룹이 되었다.


캐롤은 친정 엄마와 나이가 비슷했다.

놀랍게도 10대 후반의 두 딸을 둔 엄마였다.

캐롤은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은 미국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얘기를 나눠보니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직장에 대한 고민이 있던 나에게 좋은 동기부여를 주는 사람이 될 거 같았다.


캐롤의 동행인 스테이시는 다른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방학을 맞아 함께 순례길을 걷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반부터 발에 문제가 생겨 걷는 속도가 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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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10km를 걷었다.


걷던 중 문을 연 카페가 있어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내가 원하지 않았던 동행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말했다.
“어제 점심을 차려줬으니, 내 커피랑 빵을 사줘야 하지 않겠어?”

분명 어제 점심은 먹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내준 작은 파스타가 '점심'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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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서는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그저 적선하는 마음으로 빵과 커피값을 지불했다.
어찌 되었든 어제 점심을 얻어먹은 건 맞으니까.. 후..


오늘 숙소에 도착하면, 이제 따로 걷자는 얘길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마친 후, 나는 캐롤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다를 지나 발을 담글 수 있는 강가에 도착했다.

퉁퉁 부어버린 발과 뜨거운 정수리를 식힐 수 있는 기회

서둘러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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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역시 스테이시와 걷는 것이 불편했는지
“나도 동행이랑 떨어져서 걷고 싶어. 우리 둘이 걸을 수 있을까?”라고 제안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이제 우리는 함께 걷기로 했다.


Vila do Castelo의 알베르게는 큰 성당 건물 안에 있었다. 가장 높은 층에 배정되었다.

배낭에는 더 이상 손빨래로는 처치가 불가능한 빨래들이 가득이다.


빨래더미를 들고 세탁도 할 겸 저녁 식사를 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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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메뉴는 스테이크와 맥주. 씹을수록 맛이 살아있는 스테이크와 부드러운 감자, 그리고 시원한 맥주

좋은 동행도 생겼고, 밀린 빨래도 했으니 저녁 식사가 더 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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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내 순례길에도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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