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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가 순례길을 즐기고 있다니

a agurda까지 24km

by 고군분투 삼십대

저녁식사를 마치고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 보니 마침 같은 방에 캐나다 아주머니가 계신다.

지금이 기회다!

"내일부턴 따로 걸어요."라고 하자 왜 그러냐 묻는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당신이 싫어서요"를 삼키며 "내일부턴 제 페이스대로, 더 멀리 가고 싶어서요"라

대답했다.


알겠다고 할 줄 알았건만 아주머니는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내 짐을 일부 들어주면 니 페이스에 맞출 수 있어"

그럴 생각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상한 아줌마한테 끌려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이제 헤어진다고 하니, 손톱깎이부터 이것저것 안 쓰는 걸 달라고 하길래 그런 물건 없다고 얘기하곤 대화를 마무리했다.

정말 지독한 사람 만났구나..


자려고 누우니 꼭대기 층의 지붕은 오후 내내 달궈졌는지, 방안은 찜통 같았다.

모두 더워 연신 손부채 질을 한다. 너무 더우니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들었다.

덕분에 밤새 더위와 모기가 어마무시했다.

피곤함도 이기지 못한 모기떼와 사투를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천근만근 두 다리와 피곤한 눈꺼풀을 겨우 작동시켜 숙소를 나섰다.

오늘도 24km, 이제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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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과 걷기로 한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편하고 대화를 하면 말이 정말 잘 통했다.

24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라이프 스타일과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비슷했다.

우린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던 듯 금세 친해졌다.

이렇게 사진도 남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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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같은 돌담길을 걷고, 펼쳐진 푸른 바다에 감동했다.

혼자 걸을 때, 둘이었지만 혼자만도 못한 순간이었을 때는 몰랐던 다채로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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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맛 같은 아침, 여전한 카페콘레체와 크로와상

같은 이름의 커피지만, 카페별로 맛이 다 다르다.

이곳의 카페콘레체는 우유 맛이 가득했다.


불과 일주일, 아니 5일 전만 해도 내 발걸음엔 후회와 고통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움과 흥미가 넘쳐난다.


어디서 무얼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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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Ancora에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술을 좋아하는 나지만, 하나의 원칙은 있다.

순례길 중간에는 술을 자제할 것!

아무래도 술을 먹고 나면 나른해지고 퍼지기 때문에 혹시 모르는 부상의 위험도 생기고,

나 자신과 적당히 타협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할 거 같아서였다.


좋은 사람과 함께해서일까? 맥주 한 병정도는 마셔도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맥주로 허기를 달래고 마저 남은 8km를 걷고자 서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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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ora는 우리나라로 치면 양양 같은 곳인 듯하다.

물놀이 용품도 잔뜩 있고, 여행자들이 묵는 게스트하우스, 햄버거와 피자집이 해안선을 따라 쭉 늘어서있다.


바다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게 아쉽기만 하다.

나중에 또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눈과 핸드폰에 잔뜩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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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순간순간 모든 풍경이 참으로 멋지다.

오히려 고화질의 카메라보다 핸드폰으로 찍어내야 이 순간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


풍경을 구경하면서 오니 예상보다 도착이 늦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해 순례자 루틴을 하고 나니 벌써 저녁 6시


6kg의 배낭을 메고 걷다 보니 골반에 무리가 온 듯하다.

안 아픈 게 이상한 거겠지

걸을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생겼는데, 점점 심해진다.

배는 고프지만, 스페인의 저녁은 늦으니 약국에 들러 관절약을 구입했다.

부디 약이 잘 듣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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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도 가고, 마을 구경도 하다 보니 저녁 7시가 되어 구글 평점이 꽤나 좋은 바다뷰 식당에 들어갔다.

홍합찜과 뽈뽀(문어구이) 그리고 화이트와인 한잔씩


오늘에서야 말로 가히 완벽한 하루를 보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순례길이 점점 재미있어진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과 음식이 날 기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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