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가 남겨준 유일한 유형의 산물
오늘은 Baiona까지 30km, 포르투로 넘어온 뒤로 가장 긴 거리를 걷게 되는 날이다.
Baiona는 우리나라 인천, 부산처럼 무역이 주를 이루는 항구도시이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오며 탄 보트에서 모자를 잃어버렸다.
한국에서 꽤 거금을 투자한 뒷목까지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경량 모자였는데 말이다.
스페인의 태양은 따뜻한 걸 넘어 따가운 수준이다. 햇빛을 막아줄 모자가 없이는 하루도 걷기 힘든데..
Baiona가 꽤 큰 도시라고 들어서 여기서 살 수 있길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에 걷는 건 그리 힘들지 않다.
푹 쉬고 잤기 때문에 체력이 남아돈다.
더욱이 카페 콘 레체를 먹으러 가는 길이기에 힘듦이 상쇄된달까
한국에선 유당불내증으로 라테는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순례길에 와선 무엇보다 자주 먹는 게 바로 카페 콘 레체다.
아침에 먹지 않으면 괜히 허전하고 쓸쓸하달까
걸어야 할 거리가 길기 때문에 빵은 생략하고 카페 콘 레체만 마시고, 출발한다.
그래도 멋진 뷰 앞에서 사진은 찍어줘야지
이렇게 곳곳에 비석으로 순례길 표식이 잘 되어있다. 포르투부터 걷는다면 길 잃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제 158km 밖에 남지 않았다. 길게만 느껴지던 500km란 거리가 금세 100km대로 줄어들었다.
비슷한 풍경이지만 여전히 멋있고
땀날 때 즈음 불어오는 바람이 참으로 맛있게 느껴진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드디어 Baiona에 도착했다.
오후 2시가 다 되어 늦은 점심을 먹는다.
스페인에서 발견한 최고의 맛도리 음식! 바로 피멘토 파드론(스페인식 고추튀김)
이 식당에서 우연히 먹게 된 파드론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먹고 싶을 만큼 생생하게 맛있다.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1L 맥주
나오자마자 꿀꺽꿀꺽, 반을 비워버렸다.
매일 긴 거리를 걷지만 살이 안 빠지는 건 바로 맥주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언제 스페인 맥주를 이렇게 마셔볼까 싶어 식사 때마다 주문하게 된다.
물만큼 저렴하기도 하고
알베르게가 2개 정도 있었는데, 자리가 하나씩 밖에 없어서 따로 예약을 했다.
캐럴은 다음 목적지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고 해서, 오늘은 따로 묵어도 괜찮을 거 같다.
나른한 상태로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순례자 루틴 시작!
별로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순례자 루틴을 시작하면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
그간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지갑은 작아지고 배는 커진다.
오늘의 저녁은 간단히 샐러드와 빵으로 때워야겠다. (맥주는 이제 제로콜라 정도로 칭하기로 했다)
공용 공간에서 샐러드를 먹고 있자, 오다가다 마주친 순례자 아저씨를 만났다.
나이는 50대 중반의 스페인 사람이고, 영어를 전혀 못하신다.
나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그간 가벼운 목례만 주고받았다.
밥친구가 필요했던 터라 번역기를 이용해 대화를 시도했다.
"여기에 모자를 살 곳이 있나요?"라고 묻자 본인의 가방에서 모자를 하나 꺼내주신다.
"나 안 쓰는 모자가 있으니, 한번 써봐"
"와 감사합니다. 제가 돈을 내가 살게요!"
"잘 어울리네, 선물이니 잘 쓰고 나중에 버려"
오래되고 색이 바랜 나이키 모자였지만, 그 순간은 최고의 감동을 준 선물이었다.
모자를 추억하기 위해 사진도 찍었다.
아아.. 인류애가 충전된다.
내가 생각했던 산티아고 순례길과 점점 합치돼 가는 장면이다.
"오 브라가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주머니에서 주전부리를 꺼내 잔뜩 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작은 기념품을 사가는 건데,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저씨가 준 따스한 모자로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었다.
산티아고가 남겨준 나이키 모자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꺼내볼만큼 값지고 귀한 물건이 되었다.
이름 모를 스페인 아저씨 따뜻하고 좋은 기억을 남겨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